월간포천 2월호
구리-포천 고속도로가 끝나는 신북IC를 빠져나와 다시 북쪽으로 차를 몰면 얼마 지나지 않아 38선 휴게소가 눈에 들어온다. 이 길을 따라 좀 더 북쪽에 있는 산정호수나 철원 쪽을 가고자 하는 운전자는 이 38선 휴게소에서 잠시 차를 멈추고 커피라도 한 잔 하고픈 생각이 든다. 왜 38휴게소일까? 이 38휴게소 앞을 동에서 서로 흐르는 하천이 영평천인데 6.25 이전에는 남과 북을 가르는 경계를 이루었던 북위 38도에 위치한 하천이다. 그러다 6.25 이후 이 영평천 북쪽이 수복지구로 편입이 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38휴게소’라는 이름에서 우리의 남북 분단의 가슴앓이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임을 보여준다.
38선의 경계를 이루었던 영평천이 흘러가는 방향을 따라 서쪽으로 달리다 보면 큰 교차로가 나타난다. 교차로 입구에 설치된 ‘안동김씨 고가’라는 안내 표지판을 따라 좌회전하여 들어가면 제법 규모가 있는 멋진 한옥이 눈에 들어온다. 안동김씨 고가이다. 원래 터만 남아 있던 것을 2004년 발굴조사를 통해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 등을 복원한 것이다. 이 고가 앞쪽 절벽 위에는 금수정(金水亭) 이란 정자가 있는데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광은 가히 절경이다. 이 금수정이 조선시대 선비들 사이에서 워낙 유명했기에 이 안동김씨의 저택을 찾는 묵객들이 많았다. 그렇다보니 일반 주택들보다 손님들이 묵을 수 있는 사랑채가 큰 것이 이 주택의 특징이기도 하다. 지금도 영평천과 한탄강이 만나는 인근 지역에 주로 형성되어 있는 아름다운 절경 8곳을 영평팔경이라 부르는데 이 금수정은 한탄강에 위치해 있는 화적연에 이어 제2경에 손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금수정 난간에 걸터앉아 상류쪽을 바라보노라면 지금은 공장이나 축사들 때문에 경관이 별로 좋지는 않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겹겹이 겹쳐지는 산세를 배경으로 굽이굽이 흐르는 하천 좌우로 넓은 논들이 펼쳐져 있었을 멋진 풍광이 눈에 떠오른다. 이 정자는 원래 조선중기 1608년 김명리라는 사람이 지은 것으로 이 지역이 마치 소머리의 형상을 하고 있다하여 정자의 이름을 우두정(牛頭亭)이라 불렀다. 얼마 후 그는 그의 사위인 봉래 양사언에게 이 정자를 물려주게 된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 ’라는 시로 잘 알려진 양사언은 이 정자 이름을 금수정(金水亭)으로 고쳤다. 현판은 금수정 아래 바위에 새겨진 ‘金水亭’이란 그의 글씨를 탁본한 것이다. 절벽을 내려와 하천변을 살펴보면 바위 여기 저곳에 큼지막한 글자들이 새겨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세월이 많이 흘러 많은 물살과 바람에 글씨들이 깎여나가 잘 알아 볼 수는 없지만 여러 바위 위에서 양사언의 글씨를 찾을 수 있다. 많이 닳아 없어지긴 했어도 여전히 그의 서체에는 힘이 묻어난다. 영평천이 만들어낸 금수정 일대의 빼어난 경관은 양사언 이외에도 고려말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묵객들을 불러 모았고 금수정은 그들이 시(詩)를 겨루었던 경연장이 되었다. 지금도 금수정 아래 물과 맞닿은 이 바위 저 바위에는 그들이 남겨 놓은 시구(詩句)며 글씨들이 다수 남아있어 이곳이 얼마나 경치가 뛰어났던 곳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금수정 우측에 조성된 야구장 외곽을 돌아가는 둑방을 내려와 금수정이 있는 언덕을 바라본다. 금수정 앞쪽에 설치된 보로 인해 흐르던 물은 잠시 잔잔한 호수가 된다. 금수정과 언덕에 조성된 숲, 그리고 그 앞 영평천 여기저기에 묵객들의 글들이 새겨진 기암들이 작품이 되어 사진작가들의 카메라를 기다리고 있다. 이 멋진 금수정의 풍광을 사진이 아닌 펜담채로 담아보았다. (월간포천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