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헤이그 평화궁(Peace Palace)
네덜란드의 공식적인 수도는 암스테르담이지만 헤이그는 국왕의 왕궁과 총리 집무실, 국회, 행정 기관 대다수 뿐 아니라 각국의 대사관들이 밀집해 있어 사실상 네덜란드의 수도 역할을 하고 있는 도시이다.
헤이그는 우리나라로서는 귀에 익숙한 도시이다.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조선의 고종황제가 을사늑약(1905)의 무효화를 호소하기 위해 이준, 이상설, 이위종 3인을 특사로 파견했던 도시이기 때문이다. 특사 일행은 러시아, 베를린, 브뤼셀을 거쳐 두 달 가까이 걸려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국제회의는 이미 열흘 전에 시작하였고, 초청장이 없다는 이유로 회의장 입장이 막히게 된다. 그러자 이들은 각국 대표들과 기자들에게 불어로 된 호소문을 배포하는 등으로 세계 언론의 주목을 끌기는 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된다. 이 일이 있은 며칠 뒤 이준이 호텔에서 사망하게 된다. 우리가 할복자살로 알고 있는 이준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하여 ‘홧병에 의한 분사설(憤死設)’, ‘독살설’ 등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지만 정확한 사망원인은 알 수 없다고 한다. 이 특사 사건으로 인해 일본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키는 한편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준 열사 일행의 헤이그에서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던 영국의 언론인 윌리엄 스테드(William Stead)는 헤이그에 평화궁(Peace Palace) 건립을 구상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이 있기 전인 1899년 러시아의 니콜라스 2세가 헤이그에서 국제평화협정을 맺은 이래로 헤이그는 중립의 상징이 되었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스테드는 1903년 미국의 철강 재벌 앤드류 카네기를 설득하여 헤이그에 평화궁을 건립할 비용 150만 달러(현재 가치로는 약 5천만 달러)를 기부받게 된다. 설계안은 국제현상설계를 통하여 네오 르네상스 양식으로 제안한 프랑스 건축가 루이 M.코르도니에의 안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예산의 부족으로 적은 예산에 맞추기 위해 코르도니에와 함께 작업을 했던 네덜란드 동료 JAG 판 데르 스튀르와 함께 디자인을 수정하여 현재와 같은 디자인으로 건물을 완성하게 된다. 건물은 이준 열사 일행의 사건이 있었던 1907년 만국평화회의 때 첫 초석을 놓은 것을 시작으로 7년 후인 1913년 8월에 준공하였다. 이 건물을 완성한 뒤 네덜란드는 1945년에 이 평화궁에 국제사법재판소를 유치하게 된다. 유엔 본부 6개 가운데 5개가 뉴욕에 있는데 유일하게 미국이 아닌 중립의 상징지인 헤이그의 평화궁에 나머지 한 개인 국제사법재판소가 자리하게 된 것이다. 국제사법재판소는 상설 국제적인 법원으로서 유엔헌장에 근거하여 설립된 유엔 자체의 사법 기관이다. 한마디로 국가 간 분쟁을 국제법으로 해결하는 국제기관이다.
이 평화궁에 국제사법재판소외에 상설중재재판소, 헤이그 국제법 아카데미, 평화궁 도서관이 추가로 들어감으로써 명실상부하게 국제간 분쟁을 조정하여 평화로운 세상을 추구하는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