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탑(百塔)의 도시 체코 프라하
체코의 수도 프라하는 동유럽의 파리, 보석의 도시, 열린 역사책, 빨간 뽀족 지붕의 도시, 백탑(百白)의 도시, 유럽의 음악학원, 북쪽의 로마 등 수많은 미사여귀가 따라 붙을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이다. 프라하의 구시가지와 블타바 강 건너 프라하 성 일대는 다양한 시대의 건축물이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 때문에 1992년에는 이 지역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2000년에는 EU에서 유럽문화의 중심도시 9개 중 하나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구시가지는 골목마다 오랜 세월의 모습이 그대로 간직되어 중세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구시가지 광장에는 뾰족한 첨탑의 고딕 양식을 하고 있는 틴 성모교회와 그 옆으로 현재는 갤러리로 사용하고 있는 로코코 양식의 고츠킨스키 궁전, 그리고 아래쪽으로는 바로크 양식의 성 니콜라스 성당 등 다양한 건축양식이 한 공간에 모여 있어 서양 역사건축의 종합전시장이라 할 수 있다.
구시가지 광장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구시청사인데 그 이유는 이 건물 외벽에 걸려있는 천문학 시계 때문이다. 1410년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이 시계는 너무나 아름답고 정교하여 이와 같은 시계를 다시는 똑같이 만들지 못하도록 당시의 시계공의 눈을 멀게 했고 그가 죽었을 때는 시계도 작동이 멈추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그 이후 여러 차례의 수리와 보완과정을 거치면서 움직이는 조각상이 덧붙여졌고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부가 파손되어 작동이 멈추었으나 이후 다시 보수를 하여 1948년부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계는 상하 2개의 큰 원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쪽의 원은 천동설의 원리에 따른 해와 달과 천체의 움직임을 묘사한 것으로 1년에 한 바퀴씩 돌면서 연, 월, 일, 시간을 나타낸다. 아래쪽 원은 12개의 계절별 장면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제작 당시 보헤미아의 농경생활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매시 정각이 되면 원의 위쪽에 있는 2개의 창문에서 12사도들이 천천히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마지막에는 시계 위쪽의 황금색 닭이 나와 울면서 정각 시간을 나타내는 벨이 울리도록 되어 있다.
광장 중앙에는 체코의 종교개혁가이자 카를 대학 교수였던 얀 후스의 500주년 순교일을 맞아 세운 동상이 자리잡고 있다. 얀 후스는 부패한 성당을 맹렬히 비판하고 면죄부 판매를 비난해 로마 교황에게 파문당하고 만다. 독일에서 화형당했던 그는 마르틴 루터보다 100년 앞섰던 그의 종교개혁 운동으로 체코의 민족주의 이념과 결부되어 체코 민족의 순교자로 추앙받고 있다.
구시가지와 프라하 성 사이에 있는 블타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다리가 카를교이다. 이 다리는 1357년 대홍수로 기존의 다리가 유실되자 카를 4세에 의해 새로운 다리가 건설되기 시작하여 1402년에 완공이 되었다. 16개의 아치가 떠받치고 있는 이 다리는 건설 당시 다리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흙에 달걀 노른자를 섞어서 몰탈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때 많은 양의 달걀 노른자가 필요하게 되자 온 나라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달걀을 보내왔다. 어떤 경우는 운반중에 달걀이 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삶은 달걀을 보내오기도 하였다 한다. 이 다리는 460여 년간 구시가지 광장과 프라하 성을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가 되었다. 다리의 양 끝에는 화약탑이라고 불리우는 검게 그을린 게이트가 세워져 있는데 원래는 다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통행세를 받을 목적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완공 당시에는 ‘뉴 타워’라고 불리다가 17세기 이곳에 화약을 보관하면서 ‘화약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이 다리는 길이 516 m, 폭 9.5m로 다리 양 옆에는 성 얀 네포무크, 성 루이트가르트, 성 비투스 등 체코의 유명한 성인 30인의 성인의 조각상이 줄지어 있다. 양쪽으로 15개씩 줄지어 서 있는 조각상들은 1683년부터 1938년간 약 250년에 걸쳐 프라하의 최고 조각가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현재 다리 위에 있는 조각들은 모두 복제된 것이며 원작들은 라피다리움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30개의 성인상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조각상은 '성 얀 네포무크'의 동상이다. 1393년 당시 왕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왕비는 외로운 마음을 달래고자 왕이 전쟁터에 나간 사이에 장군과 사랑에 빠졌다. 왕비는 자신의 죄를 자신의 고해 신부인 네포무크에게 고하고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왕비의 시녀가 왕에게 모든 것을 고하자 왕은 크게 분노하였다. 이 과정에서 왕은 왕비가 네포무크에게 고해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왕은 네포무크에게 왕비의 고해 내용을 말하라고 추궁하였지만 네포무크는 신의 대리인으로서 고해성사 내용을 밝힐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왕은 ‘나에게 왕비의 고해성사 내용을 알려줄 수 없다면 한 생명에게라도 말하라’라고 제안을 하였다. 이 제안에 대해 네포무크는 잠시 생각하더니 마침 왕의 옆에 있던 개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닥속닥하여 왕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왕에게 말하였다. 이에 분노한 왕은 네포무크에게 온갖 고문을 하였고 끝내 그의 혀를 자르고 돌에 묶어서 강물에 던져버렸다. 그런데 그의 시신이 강물에 닿자마자 5개의 별이 나타났다 한다. 네포무크의 동상 머리 위의 둥근 원 속에 별이 5개가 있는 이유는 그때 나타났던 5개의 별을 의미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찾으려 애를 썼으나 당시에는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한다. 그러다 신기하게도 3년이 지난 후에야 블타바 강에서 그의 시신이 나타났다 한다. 이러한 일로 네포무크는 목숨까지 버리면서 위기에 처한 사람을 지켜주는 수호성인으로 추앙을 받게 되었다. 이후 사람들은 카를교 난간에 십자가 표식을 새겨 넣었고 1683년 네포무크 동상을 세워 놓았다. 그런데 동상을 세운 이후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네포무크 동상 앞에서 소원을 빈 사람들의 소원들이 이루어진 것이다. 네포무크는 다리에서 떨어질 때 “내 마지막 소원을 이 다리에 바치노니 이 다리에 선 자는 모두 소원을 이룰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한다. 동상 하부에 네포무크의 이름이 새겨진 중앙 동판 우측에는 얀 네포무크 신부가 강으로 내던져지는 모습이 부조로 묘사되어 있다. 이 동판의 그림 중 다리에서 강으로 내던져지는 네포무크에게 손을 대고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네포무크는 수많은 관광객들의 손길이 닿아 황금색으로 반질반질해져 있다. 다리 위에서 내던져지는 네포무크의 앞쪽에 고개를 돌리고 있는 여자가 왕비이고 그 옆에 칼로 왕비를 위협하고 있는 군인 모습이 바츨라프 4세이다. 왼쪽 동판에는 우측에 왕비가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조그맣게 새겨져 있고 좌측에 바츨라프 4세가 그의 애견을 쓰다듬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왕비의 고해성사 내용을 개의 귀에다 소곤거리며 말을 하였던 바로 그 개이다. 덕분에 왕비는 무사할 수 있었고 네포무크는 물론 개도 왕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아 충절의 상징이 되었다. 이리하여 네포무크의 동상 좌대의 왼쪽에 있는 개에게 손을 대고 빌면 애인이나 배우자가 충성스럽게 평생 자신에게 잘 해 준다고 믿어 왼쪽 동판의 개도 많은 사람들이 손길이 닿아 반질반질하다.
체코 프라하는 블타바강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면서 도시를 양분하고 있다. 강의 서쪽은 신시가지, 동쪽은 주로 12세기에 조성된 구시가지가 펼쳐져 있다. 프라하의 영역은 14세기부터 노베메스토(신시가지)로 확장되었는데 이 지역에는 유난히 뾰족탑이 많아 프라하를 ‘백탑의 도시’라고도 부르고 있는 이유이다. 그 중 프라하성은 볼타바 강 맞은편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강의 동쪽인 구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프라하성 내의 건축물은 체코를 대표하는 국가적 상징물이면서 여러가지 양식을 한꺼번에 볼 수 있어 건축박물관 그 자체의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다. 체코의 상징이자 현재 체코공화국의 대통령 궁으로 사용되고 있는 프라하 성과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슈테판 대성당이 모델로 삼았던 성 비트 성당이 언덕위에 주요 경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성 비트 성당은 925년에 처음 건립되기 시작하여 실제 완성은 1929년에 이루어져 공사기간이 무려 1천 년에 이르는 진기록을 보유한 성당이다. 건물의 양식은 처음 건설될 당시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13세기 중엽에 초기 고딕 양식이 첨가되고, 이어 14세기에는 프라하 출신인 카를 4세에 의해 왕궁과 성 십자가 교회 등이 고딕 양식으로 새로 지어졌다. 이후에 다시 후기 고딕 양식, 르네상스 양식이 도입되어 바로크시대인 1753년부터 1775년 사이에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성당을 들어서면 성당 내부로 들어오는 빛을 통하여 비쳐지는 현란한 스테인드 글래스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는 이 성당의 스테인드 글래스는 성경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 그림들은 과거 글씨를 모르는 백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라 한다.
성당의 뒤쪽으로 돌면 황금 소로라고 불리우는 중세시대의 골목이 여행객들을 기다린다. 원래 성에서 일하는 시종들이나 집사들이 살기위해 지어졌던 건물들인데 후일 연금술사들이 모여 살면서 황금소로라 이름이 불리워지게 되었다. 이 곳은 마치 난장이들이 살고있는 집들처럼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스케일의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외벽의 색채와 더불어 아름답고 정감이 넘치는 중세의 골목이다. 각 건물에는 번호가 붙어있는데 프란츠 카프카가 생활했던 22번 집과 하벨 대통령의 부인 올가 여사가 운영하는 19번 집이 유명하다. 연한 하늘색 벽면을 하고 있는 집은 1916년에서 1917년까지 머물면서 프라하성을 배경으로 한 소설 <성>을 집필하였던 곳이다. 골목에 위치한 2층짜리 나지막한 건물들 1층에는 다양한 기념품점들이 골목을 다 차지하고 있다. 1층은 건물들마다 벽으로 구획되어 있으나 2층은 하나의 공간으로 모두 연결되어 있다. 좁은 계단을 따라 2층에 오르게 되면 길다란 공간으로 중세 기사들의 다양한 갑옷과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갑옷들을 보면 어떻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쇠덩어리를 뒤집어쓰고 전쟁을 했을지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다. 황금소로를 지나면 입구에 해골이 조각되어 있는 모습에서 심상치 않은 공간이 있음을 암시해 준다. 중범죄자를 수용하는 지하감옥으로 달리보르 탑이라 불리우는데 이는 최초 수감자 달리보르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란다. 이 감옥에는 중세시대에 일반 죄수 뿐 아니라 당시에 만행하던 마녀사냥으로 인해 그들을 고문하던 온갖 고문 기구들이 적나나하게 전시되어 있다. 인간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온갖 상상력이 다 동원되다시피 한 각양각색의 고문 기구들을 보노라면 소름이 끼친다. 당시에 마녀로 몰려 고문을 당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당했는지를 짐작케 해 준다.
성당 주변으로 붉은 색 지붕이 주를 이룬 가운데 몇 몇 색상의 지붕과 파스텔 풍의 벽면 색채를 한 건축물들은 현대의 어떤 도시보다도 더 아름다운 도시 경관을 연출한다. 유유히 흐르는 블타바강을 중심으로 붉은색 지붕들 사이로 중간중간 솟아 있는 다양한 높이의 탑들이 ‘백탑의 도시’라는 이름처럼 흥미로운 도시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고 있다. 프라하의 아름다운 도시 모습에 흠뻑 취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