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친구가 집을 방문한다. 점심 티타임을 가진다고 했다. 평상시 같으면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다. 왜냐하면 원래대로라면 그 시간에 회사에 있을 테니까. 그저 전 날 방정리나 거들면 될 일이다. 그리고 회사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아내에게 '오늘 어땠어? 재밌는 얘기 많이 했어? 뭐 먹었어?'따위 물어도 그만, 묻지 않아도 그만인 질문을 하면 될 일이다. 질문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평소라면 그리하면 될 일이었다.
그 별 일 아닌 일이 오늘은 특별 고려 대상이 되었다. 최근 공황과 우울증으로 인해 휴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래 회사에 있었을 그 시간에 어디에 있어야 할지고민해야 했다. 아내가 친구를 만나는 동안 옷장에 들어가, 숨바꼭질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요새 들어 방광에 물이 빨리 찬다. 화장실에 자주 간다. 참을 수 없을 것이다.
#백수의 시간
아내에게는 걱정 말라고, 근처 카페에서 책을 읽겠다고 하고 집을 나섰다..(걱정 마, 오빠 다녀올게. Peace.)
집 앞에 있는 메가 커피로 갔다. 1,500원짜리 핫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2,000원이다. 현재 나는 무급 휴직 중이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에어컨 바람이 너무 세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골랐다고 해두자.
2,000원짜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 추워서 오래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1,500원짜리 핫아메리카노를 선택하였다. 들고 온 태블릿으로 게임도 여러판 하고 들고 온 책도 거의 다 읽었다. 여간 시간이 가지 않았다. 초등학생부터 중고등학생까지 어린 친구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데시벨이 점점 올라간다.(야, 이놈의 자식들아, 여기가 느그집 안방이냐.)신경이 거슬리고, 초조해진다. 사람 많고, 시끄러운 곳은 위험하다. 공황 증세는 언제 찾아올지 모르고, 올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자체를 생각하는 데서, 이미 증세는 시작되는 거니까.
배도 고프고, 더 있을 곳이 아니란 생각에 나왔다. 밥 먹을 곳을 검색했다. 순댓국과 가성비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했다. (순댓국 & 가성비) 순댓국을 먹고 싶지만, 요새 순댓국은 너무 비싸다. 9,000원 하는 곳이 부지기수다. 가성비는 중요한 키워드다.검색하다가 기가 막히게 저렴한 순댓국 집을 찾았다.
신당역 2번 출구 부근에 있는 할머니 순댓국. 순댓국 보통 3,500원 (특 4,000원) 막걸리 2천 원, 소주 3,000원 고기 한 접시에 3천 원(大자는 5천 원) 그야말로 미친 가격.
블로그 업로드 날짜를 확인했다. 2023년이다. 동시대에 이렇게 인간적인 순댓국집이 있다니, 안 갈 수가 없다.
돈은 없지만, 시간은 많다. 고민할 필요도 없다.
#신당동.
언제 왔을까. 대학교 1학년 02년도 월드컵 열기로 온 나라가 들썩일 때, 그 즈음 일 것이다. 그때 신당동 떡볶이를 먹으러 오고, 다시 오는데 20년이 걸렸다.(입에 맞지 않아서 다시 오지 않았다.)20년이 흘렀다. 나는 만 18세 대학교 1학년 새내기에서 만 39세 아저씨가 되었다.(헐, 나이가 더블이네) 감상은 딱 이 정도까지만, 난 현실적으로 가성비 넘치는 3,500원짜리 순댓국을 먹으러 왔으니까. 찾기 쉬웠다. 신당역 2번 출구에서 나와 1-2분 정도만 걸으면 바로 나왔다. 보기에도 오래된 가게였다. 정문에는 40년이 넘었다고 쓰여 있었다.
뭐 먹을래 젊은이.
젊은이라는 호칭, 참 오랜만이다. 다른 데 가면 고연령에 속하고, 요새는 주로 차장님, 팀장님, 형님, 선생님, 아저씨 등으로 불렸다. 오랜만에 듣는 젊은이라는 호칭이 신선했다. 신선했지만, 그럴만했다. 가게에는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3시인데도 손님들로 자리가 가득 차 있었고, 평균 연령은 70대 이상으로 보였다. (여기서 나는 애다.)
가격은 블로그에 나와 있는 대로였다. 소주 한 병과 순댓국(특), 고기(소)를 시켰다. 그렇게 시켜도10,000원. 기적 같은 가격. 그럼에도 순댓국과 고기의 퀄리티가 절대 낮지 않았다. 심지어 순댓국에는 내가 좋아하는 새끼보와(혹은 애기보라고 불리는) 오소리감투, 각종 다양한 부속이 푸짐하게 들어 있었다. 맛있게 먹고 나오니, 태양이 세게 내리쬐고 있다. 햇볕을 쬐고 싶었다. 회사 다닐 때는 볕을 쬘 일이 없다. 점심시간 때나 겨우 쬘 수 있을 뿐이다. 온전히 땀이 날 때까지 온몸 가득 쬐면서 걷기 시작했다.
#황학동.
내키는 걸음에 따라, 플로우에 따라, 옮기다 보니, 어느새 황학동 시장에 와 있었다. 신기한 풍경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다 낡아빠진 카세트테이프와 CD, LP 판, 철 지난 낡은 옷들과 신발, 웃는 애도 울릴 것 같은 머리 큰 인형, 90년대 텔레비전, 녹슨 청동 부처상 등 각양각색의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누가 살까 싶었다. 저렇게 낡고 쓸모없는 물건들을 사가는 사람들이 있을까.
2023년에서 한 참 뒤로 후퇴한 물건들. 꼭 누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된 사람들, 오래된 물건들. 신기하게도 가만 보고 있자니, 물건을 사고 흥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오래된 사람들. 오래된 물건의 가치를 알아보는 오래된 사람들. 어떤 분은 한두 개도 아니고, 한 보따리를 사들고, 택시에 실어 갔다.
택시에 실려가는 반가사유상을 보는데, 나 자신이 오버랩되었다. 수인을 맺고, 반가부좌를 틀고 있는 나. 겨드랑이와 머리에 초록색 녹이 슬어 있다. 더 이상 누구도 봐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버려진 고물들 틈새에서 낡아져갈 거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꽃무늬 양산을 쓴 백발 할머니,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넘기고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백발 멋쟁이 할아버지가 LP판을 집어든다. 애정 어린 표정으로 LP판을 바라본다. 검은 봉지에 담는다. 그리고 반가사유상을 보더니 반가운 얼굴로 들어 올린다.
영원 같은 시간을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는데, 제자리를 찾아간다. 원래 절에 있던 반가사유상을 카페의 오브제로 사용한다. 80년대 다방 분위기의 카페에서 LP는 옛 음악을 재생한다. 반가사유상은 카페를 방문하는 손님을 향해 방가방가 한다.(엥?!)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필요하지 않지만, 어떤 누군가는 그 가치를 알아본다. 가치가 없는 것은 없다. 누구나, 무엇이든 쓰임새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어디에 선가는.)
요 며칠 집에 있었는데, 밖에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해본다.젊은이라는 말도 듣고, (아직 칠십 대 할아버지들에 비해선 한참 애송이인 것이다)팔려나가는 고물들 속에서 나도 어쩌면이라는 희망도 발견했다.오랜만에, 태양을 가득 받아들였다. 그 속에 담긴 비타민 D를 흡수하며, 희망찬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