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졸라 #소설 #책 #루공마카르총서 #인간짐승
에밀 졸라가 1867년 [테레즈 라캥] 출간 이후 발자크의 ‘인간극’에 영향을 받아 총 23년에 걸쳐 쓰인 ‘루공마카르 총서’는 제2제 정기 프랑스 사회를 총체적으로 담아내겠다는 의도로 기획되었다. ‘루공마카르 총서’는 ‘루공마카르’의 가계를 통해 다양한 계층과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한 권 씩의 책으로 담아냈다. 흡사 우리의 대하드라마 [토지]가 조선 후기인 1879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의 격동기를 살아간 경남 하동 평사리의 최참판댁 최 서희라는 인물을 통해 그 시대의 정서를 후대에 성공적으로 전달했던 것처럼 에밀 졸라의 ‘루공마카르 총서’는 프랑스판 대하드라마라고 볼 수 있겠다. 차이가 있다면 [토지]가 ‘최 서희’라는 한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쓰인 각본인 반면 ‘루공마카르 총서’는 그 가계를 구성한 인물들 각각을 주인공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훨씬 대규모라는 규모의 차이를 갖는다.
코로나19로 집에 있는 동안 나는 에밀 졸라가 그린 큰 그림 중 일부인 [제르미날], [나나], [인간 짐승]을 읽었다. 아직 ‘루공마카르 총서를 모두 읽은 건 아니지만 나는 그중 3권을 읽으면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건 에밀 졸라가 직조공이 다양한 종류의 실을 섞어 무늬나 문양이 있는 옷감을 짜내 듯 에밀 졸라가 ‘루공마카르 총서’를 써내는 작법이 이와 흡사하다는 점을 발견한 것이다. 동전의 두 면처럼 서로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삶과 죽음, 가난한 노동자와 자본가 또 매춘부와 종교 그리고 인간의 역사와 문명의 역사를 에밀 졸라는 하나의 베틀 위에 섞어서 옷감을 지어내고 있다.
{ ~기계는 몸을 일으키려는 듯 꿈틀거리며 무릎처럼 구부리고 있던
거대한 크랭크암을 펼치려고 했다.
하지만 끝내 숨을 거두면서 박살이 난 채 땅속으로 영영 사라졌다.
~깊은 땅속에 납작 웅크리고서 인간의 육체를 집어삼키던
음험한 짐승은 더 이상 거칠고 긴 숨을 내쉬지 않았다. } [제르미날 2권] p292~293
{ 라리종호는 여전히 광채를 발하며 불의의 사고를 당해
길 한복판에 쓰러진 호방한 짐승처럼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흡사 사지가 경련을 일으키는 것처럼,
피스톤과 바퀴를 잇는 연결봉들은 생명의 마지막 몸부림처럼
부르르 떨 뿐이었다.
~허옇게 배를 드러낸 그 거대한 짐승은 다시 잠잠해지더니
조금씩 평온한 잠에 빠져들다가 끝내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라리종호는 숨을 거두었다. } p461~462
에밀 졸라가 짓는 옷감 위에서 어떤 죽음([제르미날]에서 노동자들의 죽음)은 어떤 삶(새로운 노동운동의
희망을 품고 떠나는 에티엔)을 낳고 기계의 죽음([제르미날]에서 탄광 기계의 죽음)은 거대 자본([제르미날]에서 탄광 자본에 흡수당한 드뇔랭)의 탄생을 낳았으며 [나나]에서 경주마 ‘나나’의 승리와 곧 이은 죽음은 잠깐
화려하게 밤하늘을 수놓았다가 몇 초 뒤 사라지고 마는 폭죽 같은 삶을 살다 간 인간 ‘나나’와 닮은꼴이다. 이처럼 서로 실제의 삶에서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반대쪽을 볼 수 없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루공마카르 총서’ 안에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에게 영향을 받고 또 그 영향은 또 다른 것들을 만들어낸다.
[ 이번 작품은 중심을 이루는 하나의 살인 범죄를 둘러싸고
여러 범죄가 얽힌 그런 이야기라네.
나는 이 이야기의 구도에 매우 만족한다네.
그건 아마도 이제까지 내가 한 것 중 가장 공들인 구도일 걸세.
~요컨대 문명 밑에 웅크린 인간 짐승을 그린 것이지. ] p582
어쩌면 에밀 졸라의 ‘루공마카르 총서’는 발자크의 ‘인간극’에서 더 나아간 ‘인간’이라는 미지의 해를 풀기 위한 실험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 짐승]은 에밀 졸라가 자신이 계획한 ‘실험극’을 위해 가장 정교하게 인물과 사건을 배치한 작품이다. 작중 인물 세브린이 끼고 있는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시키는 조그만 루비 알이 박힌 금빛 뱀 모양의 반지가 하나의 사건을 촉발시키고 그 사건으로 인해 다른 사건들이 연결되는 것처럼 에밀 졸라는 [인간 짐승]에서 하나의 살인을 두 번째 살인과 정교하게 연결 지었다. 앞서 얘기한 작중 인물들과 시대 배경 그리고 삶과 죽음, 인간의 역사와 문명의 역사가 서로의 꼬리를 무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한데 섞여 돌아감으로써 과거 혈거 시대부터 시작된 인류의 본원적인 폭력성은 에밀 졸라의 [인간 짐승]에까지 내려와 자크가 세브린을 죽이게 되는 것이다.
[인간 짐승]에는 여러 번의 살인이 등장한다. 세브린의 남편인 루보는 수양딸인 세브린을 열여섯 살 육 개월 때 성폭행한 그랑모랭 법원장을 격분 상태에서 살해했다. 자크를 연모하는 건널목지기 플뢰르는 질투에 눈이 멀어 충돌사고를 유발하여 라리종 기차와 다수의 승객을 사상사로 만들었고 철도원인 미자르는 천 파운드를 감쳐 두고 주지 않는 아내 파지를 독살했으며 페쾨는 자신의 내연녀 필로멘과 관계를 맺은 자크를 죽이려고 싸우다가 함께 죽고 말았다. 이 작품에서 세브린의 살해는 다른 살인들과는 큰 차이점을 갖는다. 여타의 살인이 원한과 질투 이해관계에 의한 살해 동기가 존재하는 반면 자크가 저지른 살인은 정신병에 의한 심신상실에 가깝다.
{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 사람이, 몸을 일으키지는 않고
단도를 뽑아서 태양빛에 비추며 나에게로 겨누었다.
빛이 강철 위에서 반사하자, 번쩍거리는 길쭉한 칼날이 되어 나의 이마를 쑤시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기우뚱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는 온몸이 긴장하여 손으로 피스톨을 힘 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나는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를 만졌다.
~그때 나는 그 굳어진 몸뚱이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린 네 번의
짧은 노크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 [이방인] p 87~88
{ 자크는 몸은 돌리지 않고 오른손으로 뒤를 더듬어 칼을 집어 들었다.
~그의 갈증이, 언제인지 정확한 기억은 잃어버렸지만
아주 오래전에 당했던 모욕을 앙갚음하려는 갈증이,
먼 옛날 동굴 속에서 인류 역사상 맨 처음 속임수가 생겨난 이래로
누대에 걸쳐 수컷에게서 수컷에게로 축적되어온 그 원한이 되살아날 것일까?
그는 광포한 눈으로 세브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공포는 섹스의 그 시커먼 구멍으로 통하는 문이고,
사랑은 그 끝에 죽음이 기다리며,
더 완벽하게 소유하기 위해서는 절멸시켜야 한다.
~그는 치켜든 주먹을 내리쳤다.
칼이 그녀의 목구멍에서 나오려던 물음에 정확히 내리 꽂혔다. } p512~513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아랍인을 살해한 경우처럼 자크의 살인은 꿈속처럼 모호하다.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고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했다고 하지만 에밀 졸라는 유가의 주장과는 다르게 인간에게는 제도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표출되지 못한 채 잠재되어 있는 폭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 기관차가 도중에 산산조각 내버린 희생자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기관차는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로 인해 뿌려진 피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미래를 향해 전진하고 있지 않은가?
운전자도 없이, 어둠 속 한가운데로,
마치 살육의 현장 한복판에 풀어놓은 눈멀고 귀먹은 한 마리 짐승처럼,
기관차는 이미 피곤에 절고 술에 취해 혼곤한 상태에서
악을 쓰며 노래를 부르는 병사들을 싣고,
그 총알받이들을 싣고, 달리고 또 달렸다. } p 570~571
나는 지금으로부터 백 년도 넘은 1890년도에 쓰인 [인간 짐승]의 마지막 대목이 인간 문명의 어쩔 수 없는 종착역을 보여주는 것 같아 섬찟했다. 인류의 역사 이래 자행된 무수히 많은 합법적(전쟁, 사형 등), 비 합법적(살인) 죽음을 뒤로한 채 인류는 운전사 없이 앞으로만 내달리는 폭주 기관차 인지도 모른다. 에밀 졸라의 [인간 짐승]은 인간이라는 껍질(제도와 문명)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언제든 기회만 되면 기꺼이 짐승이 될 수 있는 우리의 본성에 대한 실험의 보고서이자 인류의 내일에 대한 예언서 같아서 읽고 나서 가슴이 답답하다. 어쩌면 이 책은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되묻는 숙제 같은 책인지도 모르겠다.
Ps: 진범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정치적 혼란을 피하기 위해 사건을 덮기 위해 예심판사에게 뒷거래를 제안하는 1890년대 프랑스 사법부의 모습은 우리나라 사법부를 연상시킨다. 결국 인류문명이 진보의 수레바퀴를 굴리거나 말거나 가진 자와 힘 있는 자를 보호하기 위한 개의 역할에서 사법부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어찌 보면 이 작품을 통해 나는 진짜 짐승은 살인자가 아니라 사법부란 생각을 하게 된다.
{ 안 된다, 결단코 안 된다, 이 사건이 루보 부부의 사건이 되면,
진짜 범인의 사건이 되면 훨씬 더 추악한 사건이 되고 만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는 이 사건이 죄 없는 카뷔슈의
사건으로 규정되는 편에 설 작정이었다.
~”요컨대 불기소 처분이 바람직하오…..
사건이 그렇게 결말이 지어지도록 일을 만들어보시오.”
~당신 자리는 이미 정해졌소, 시간문제일 뿐이지……
또 하나, 이왕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당신이 오는 8월 15일 훈장을 받기로 추서 되었다는 사실도
알려주게 되어 나도 참 기쁩니다.” } p207~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