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 가리, 인간의 존엄이라는
파랑을 좇아 날아가다.

#로맹가리 #책 #소설 #마음산책 #문학

by 묭롶

내가 로맹 가리를 처음 만난 건 2012년 11월 이었다. [흰 개]의 표지에 실린 로맹 가리를 서점에서 처음 본 순간 나는 그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싶어 졌다. 이후 작품의 출간 연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그의 작품들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2012년 11월 [흰 개]를 첫 만남으로 시작된 로맹 가리 읽기는 2020년 10월 그의 마지막 작품인 [노르망디의 연]에 이르렀다.






{ 나는 그걸 보았다. 그것은 승리의 기호로 두 팔을 V자로 벌리고

하늘에 펄럭이고 있었다.

드골 장군의 연이 라모트 꼭대기에 떠 있었다.

바람이 살짝 불어 연은 더 높이 날아올랐고,

줄이 팽팽해졌다.

줄에 묶인 건 드골의 취향이 아니었을 것이다.

드골은 위풍당당하게 펄럭였다. } p422~433






[노르망디의 연]의 작중 인물인 뤼도가 이 작품 말미에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한 후 아우슈비츠에서 풀려난 삼촌 앙브루아즈가 집 앞 언덕에서 띄워 올린 드골 연을 발견하고 삼촌을 향해 마구 달려가는 대목을 읽을 때 나는 삼촌이 띄워 올린 드골 연과 같은 하늘에 로맹 가리의 전 작품들이 연이 되어 하늘에서 위풍당당하게 휘날리는 모습이 겹쳐 보여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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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인 로맹 가리를 위해 목숨을 건 헌신을 멈추지 않았던 로맹 가리의 엄마가 그려진 [새벽의 약속] 鳶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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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움을 찾기 힘든 전쟁 속에서 사랑과 숭고한 희생을 포기하지 않고 노래했던

도블란스키가 그려진 [유럽의 교육] 鳶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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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더 갖겠다는 악다구니 속에 인간의 존엄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도

코끼리 보호를 외쳤던 [하늘의 뿌리]의 모렐이 그려진 鳶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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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우애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자기 앞의 生]의 로자 아줌마와 꼬마 모모가 그려진 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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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닌 스스로 원하는 자신을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솔로몬과 마드모아젤 코라가 그려진 [솔로몬 왕의 고뇌] 鳶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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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이라도 더 팔이 길어져 타인을 감싸줄 수 있는 이타심의 길이가

늘어나기를 소망했던 [그로칼랭]의 샐러리맨 미셸 쿠쟁이 그려진 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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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나이에 얻은 아들이 삶 속에서 마법을 믿길 바랐던 주세페 자가가 그려진 [마법사들] 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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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에 눈 감지 않고 그들에게 다가가기를 소망하며 이타심이라는 없던

기관이 생겨나길 바랐던 최초의 인간이 그려진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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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악한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를 포기하지 않고 나아갔던 [레이디 L]이 그려진 鳶 등……….. 로맹 가리의 전 작품이 연이 되어 드높은 창공을 날고 있었다.






{ -너, 설마 병으로 죽는 건 아니겠지?

~-날 건드리지 마, 너도 걸릴지 몰라.

~병에 걸릴까 봐 겁낸다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무슨 소용이야? } p54






로맹 가리가 자신의 전 생에 걸쳐 작품을 통해 외치고자 했던 사랑, 우애, 박애, 헌신은 현실에서는 땅으로 추락한 연처럼 회생 불가능한 폐기물이지만 그가 그토록 지켜내고 싶어 했던 그 모든 것들이 인간의 존엄이라는 파랑을 쫓아 일제히 창공에서 위풍당당하게 휘날리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로맹 가리 또한 분명히 그 가슴 벅찬 광경을 보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바람이 없으면 바닥으로 곧 추락해버리는 연처럼 로맹 가리는 꿈과 상상력이 없는 삶은 절대 하늘로 날아오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작품 속에서 2차 세계대전 중 앙브루아즈가 띄워 올리는 연이 레지스탕스에게 보내는 신호나 연락책이 될까 봐 일정 높이 이상 연을 띄우지 못하게 하는 독일군처럼 우리는 스스로 꿈꾸기를 포기함으로써 스스로 일정 높이 이상으로 연을 띄워 올릴 생각을 애초에 포기해버렸는지도 모른다.






{-어떠냐, 뤼도, 뭐라고 말하고 싶어?

이 녀석, 꽤 괜찮지?

내 솜씨가 여전하지.

수백 개는 필요하겠는걸.

온 나라가 요구할 테니, } p423





글이라는 연 종이에 희망을 연 살 삼아 그 연의 표면에 작품을 그려내어 상상력으로 하늘로 띄워 올리며 그 연이 인간의 존엄이라는 파랑에 가 닿기를 그리고 그 바람을 담은 연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그 자신의 삶을 연처럼 띄워 올리길 희망했던 로맹 가리는 그 스스로 연줄을 끊고 연이 되어 파랑을 좇아 날아가버렸다.






{~난 아침부터 밤까지 끊임없이 달라질 필요가 있어.

현재의 나 자신밖에 되지 못하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은 없어.

상황이 만들어낸 보잘것없는 작품 말이야…..

난 영원히 결정되는 게 끔찍이 싫어……} p80






그 자신의 죽음의 이유를 이 책의 마지막 문장에서 찾으라는 로맹 가리의 유서를 이 책을 읽고서야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작품들이 연이 되어 인간의 존엄을 위풍당당하게 뽐내며 휘날리는 광경을 본 로맹 가리는 “나는 마침내 나를 완전히 표현했다.”라고 말한 뒤 [노르망디의 연]의 마지막 구절인 “더 잘 말할 수는 없겠기에.” 스스로 연줄을 끊고 영원히 노래하는 나데이다([유럽의 교육]-로맹 가리의 첫 소설)가 되어 전설(로만 카체프-> 로맹 가리 -> 에밀 아자르->나데이다로의 변신)로 남았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삶을, 자기 생각을, 자기 꿈을 만들고……

연을 만드는 거지. } p105



{-상상의 작품이 아닌 건 살아볼 가치가 없어.

상상 없이는 바다도 한낱 짠물일 뿐일 테니까…….

~물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놓지 말아야 하지.

하지만 그건 그 현실의 목을 제대로 조르려고 붙드는 거야.

더구나 문명이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의 목을 계속해서

비트는 방식일 뿐이지……} p275






이제 [흰 개]에서 시작된 로맹 가리와의 만남은 그의 마지막 작품 [노르망디의 연]에 이르렀지만 나는 작중에서 뤼도가 릴라와 헤어져 있는 순간에도 그녀를 기억함으로써 그녀와 함께 했던 것처럼 내가 로맹 가리를 만나는 그 모든 순간들 속에 언제나 그와 함께 한다는 걸 믿는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보며 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실체를 알 수 없지만 별의 존재를 확신하는 것처럼 로맹 가리가 띄워 올린 연(그의 작품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현실에서 찾기 힘들어진 사랑, 우애, 이타심, 박애가 언제나 우리의 삶 속에서 함께하고 있으며 삶은 번번이 날아오르기도 전에 땅바닥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나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 삶에 꿈과 상상력을 불어넣어 다시 하늘로 띄워 올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