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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두녕 Mar 21. 2023

Ending Scene: 나의 죽음을 관망하며

해고와 고용 (上), FEB-23

2023-02


                

        샌프란시스코의 새해는 오랜 비로 시작합니다. 한국보다 10~20도 높은 평균 겨울 온도 덕분에 눈이 아닌 비가 내리는 까닭입니다. 2월이 되어 주야장천 내리던 비가 잦아들기 시작하면 천천히 벚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때때로 뒤늦은 소나기가 찾아오면 일찍 개화한 꽃잎들은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거리에 흩날리곤 합니다. 


        만연한 봄기운과는 다르게 이곳에는 칼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수많은 테크 기업들이 정리 해고를 진행 중이기 때문입니다. 제 회사 또한 예외는 아닙니다. 지난 10월, 1차적인 해고를 마쳤음에도 추가적인 해고를 진행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하는 매니저의 불안한 눈빛에서 스스로가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직 팀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추가적인 정리해고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로부터 해고 통보 예정일 이틀 전까지, 약 3주간이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습니다. 낮과 밤이 없이 일을 했고, 숙면을 취하지도 못했습니다. 아직 스스로의 힘으로 나오지 않은 결과를 바꿔 볼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고, 또 이 위기를 계기로 업무에서 한 단계 성장하기를 바랐던 까닭입니다. 밤늦은 시간, 다른 회사에서 비슷한 처지에 있던 룸메이트와 마주칠 때면, 지금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줄 수 있는 것은 과로(過勞)밖에 없는 것 같다는 말을 하며 씁쓸히 웃고는 했습니다.


        고통의 끝은 예상치 못하게 찾아왔습니다. 통보 예정 일 며칠 전, 회사에서 우연히 마주친 매니저가 평소와 다르게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고 눈을 잘 마주치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이미 결정이 내려졌음을 직감하고 나의 무력함을 확인했을 때 느꼈던 감정은 안도감과 홀가분함이었습니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퇴근을 앞두고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책상을 정리하며 생각했습니다: '아 나에게 남은 것은 하나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 뿐이야.'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창 밖 풍경들 사이로 번지는 어둠을 보며 지난날의 죽음들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가장 먼저 생각났던 죽음은 입대였습니다. 머리를 자르러 가기까지는 너무도 힘들었지만 막상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은 흥미롭게 지켜보았던 당시의 기억이 지금과 제법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금번과 같이 타의적 죽음이기도 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죽음은 대학의 졸업이었습니다. 4년 혹은 6년간의 대학 생활은 저에게 있어 자신에 대한 믿음을 되찾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기를 지내오며 불안에 떨던 과거의 내가 죽고 스스로를 더 신뢰하기 시작했기에, 그리고 앞으로는 나의 행복에 앞서 나의 공동체와 사회의 행복을 놓아보자고 다짐했기에, 삶의 한 막이 지나갔다고 느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의 연장선상에서 궁금해졌습니다. 대학의 졸업부터 지금까지, 나는 기억에는 남지 않은 수많은 죽음들을 마주했던 것인지. 혹은 그동안 새로 태어나는 일 없이 같은 태도로 삶의 쳇바퀴를 밟아왔던 것인지. 


        열차에서 내리니 거리에는 옅은 분홍 빛의 꽃잎들이 드문드문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이들도 자신의 죽음을 예상했었을까요. 문득 나의 죽음을 담담히 관람하는 것 역시 쉬이 오지 않을 사치라는 생각이 들어 핸드폰으로 방금 내린 열차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나는 언제 다시 퇴근열차에 오르게 될까요. 또 언젠가 피로에 젖어 다시 태어났음을 잊게 될까요. 온갖 불확실함들 사이에서 단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죽음을 받아들였음에도 벌써부터 새로운 삶을 바라고 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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