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영원히 생일 - 권누리
문학동네 시인선 240
권누리 시인의 『오늘부터 영원히 생일』은 ‘생일’이라는 예쁜 단어 뒤에 숨겨진 감정들을 마주하게 되는 시집이다. 제목만 보면 환하고 경쾌할 것 같지만 시 속에는 반복되는 하루와 쉽게 사라지지 않는 외로움 같은 마음들이 담겨 있다. 시인은 축하받고 싶은 마음과 기다림, 그리고 사라진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다. 특히 ‘영원히 생일이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은 사랑받고 싶고 잊히고 싶지 않은 인간의 마음을 상징처럼 드러낸다. 축하와 쓸쓸함이 나란히 놓인 정서가 이 시집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p.12
비기너
죽지 마
명령하면 안 되니
어제는 피아노를 샀어
가끔 치려고
명랑하게
창문 너머 비행기가
밥그릇은 언제나 비어 있고
천장에
달라붙은 열기가 깔깔 웃으면
이 이상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구르기 위한
언덕을 갖고 싶어
처박힐 우물도
자랑 없이
칭찬도 없이
청소기 헤드로 빨려들어가는
정오
함께 있을까
조금만
더 울어보고
오늘은 버티는 마음만으로 충분할 수 있다
‘생일’이라는 단어는 민트색 표지에 핑크빛 글씨로 적혀 있었다. 그래서 이 시집을 펼치기 전까지는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운 시들이 가득할 거라고 막연히 기대했다. 하지만 시집의 첫 작품인 「비기너」는 축하보다는 버팀에 가까운 감정으로 시작했다. 삶을 적극적으로 사랑하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그저 오늘을 넘기기 위해 애쓰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시 속의 화자는 특별한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의욕 없는 하루의 단면을 표현하는 듯했다. ‘이 이상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은 더 잘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 던지는 물음처럼 다가왔다. 잘 굴러가기 위한 언덕이나 넘어질 수 있는 구덩이를 바란다는 표현에서는 일반적으로 다른 시들이 ‘잘 살겠다’라는 각오를 남기는 의욕을 드러내는 데 비해 삶에 대한 욕심보다 체념에 가까운 솔직함이 묻어난다.
마지막 부분에서 함께 있어도 괜찮겠느냐고, 조금만 더 울어봐도 되겠느냐고 묻는다. 이 시는 위로를 건네기보다 대신 아무 말 없이 곁에 앉아 있는 선택을 한다. 그래서 이 시집에서 말하는 ‘생일’은 축하의 날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인정받는 하루처럼 느껴졌다. 삶이 힘들 때 꼭 희망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살겠다는 거창한 다짐보다 오늘을 버티는 마음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p.76
선택과 집중
가장 투명한 것은 빗물이어서
맞아도 다치지 않았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곳마다 반창고를 붙이며
천체의 흐름을 잊고 이름 붙이는 일을 하며
몸을 뒤집는다
운동장 바닥에 누워 있으면
세상이 납작하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는 게 이상했다
평평하고 정갈해서 아름다운 우주에 대한
소문을 아무리 열심히 만들어도
그것은 금세 청소되었다
비가 내린다 지붕이 모처럼 제 몫을 한다
어떤 물은 녹색,
푸른색
또 어떤 것은 놀랍도록 투명했다
손에 담그면 색은 사라지고,
빛의 성의 없는 사랑에 자주 감탄하며……
바닥이 젖어가는데 아무도 우리를 찾으러 오지 않는다
계절이 종식되었다. 우리의 예언이 이루어지리라 믿은
인류가 서둘러 죽어버렸다
선택과 집중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허벅지에 붙여둔
반창고가 덜렁거렸다
반창고를 떼어내고 상처를 직면해야 한다
많은 것이 편해지고 즐길 거리는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울을 느끼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우리는 힘들다는 말을 꺼내기보다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 법을 더 빨리 배우며 살아가는 중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반창고’는 상처를 치료하기보다는 잠시 가려 두는 일, 아픔을 직면하기보다 그저 덮어두는 쪽을 선택하는 태도를 표현하는 것 같았다.
SNS 속 세상은 언제나 밝고 단정하다. 모두가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뒤편에는 지친 마음들이 쌓여 있을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며 얼마 전 읽었던 『편안함의 역습』이라는 책이 생각났다. 이제는 편안함이 중요시되는 시대를 넘어 오히려 불편함을 의식적으로 감수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 책.
시인은 이 작품을 통해 아프지 않기 위해 감정을 덜어내고 맞아도 아프지 않은 빗물 같은 선택만을 반복하는 삶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우리의 우울감은 소리 없는 피로에 가깝다. 갈수록 차가워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외면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러한 외면에 기대어 살아갈 수 없다. 제대로 된 치료는 임시방편의 반창고를 떼어내고 상처를 열어 직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p.84
회심
이 세계는 이차원
흐르지 않는 강과
흡음성의 사랑
매일매일 몰래
하지 않아도 되는 믿음을
잘 간직하고 있다
누구도 벨을 누르지 않은
버스가 멈춰 선다
등 뒤를 돌아볼 때도
시간은 팽팽하게 흘렀다
감정을 잃고 울림이 없이 살아있다는 것
시가 주는 전체적인 느낌은 ‘디스토피아’ 그 이후의 삶을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 시 속 세계는 이미 무너질 것은 무너지고 혼란과 저항의 시간마저 지나간 뒤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더 이상 절망하지도, 분노하지도 않는다. 대신 흐르지 않는 강처럼 감정이 닳아버린 채 일상을 살아간다. 모든 것이 멀쩡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생동하는 감각이 없다.
시에 등장하는 ‘흡음성’이라는 단어를 따로 검색해 보았다. 소리가 벽, 천장, 바닥 등 구조물에 부딪혔을 때 반사되지 않고 흡수되는 정도를 의미한다. 즉, 흡음성이 높을수록 소리의 울림이나 메아리가 줄어들고, 공간의 음질이 개선된다고 적혀 있었다. 이 시에서의 사랑 역시 흡음성이 높다. 감정은 오가지만 울림은 남지 않고 말은 전해지지만 되돌아오지 않는다. 서로를 향해 내뱉은 마음이 공기처럼 사라지는 관계, 그것이 이 시가 말하는 사랑의 풍경이었다.
이 시의 세계는 조용하다. 그래서 오히려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누구도 벨을 누르지 않았는데 버스가 멈춰 서고 시간은 흐르지만 체감할 수 없다. 삶이 선택이 아니라 관성으로 유지되는 상태. 시인은 우리가 이 무감각한 세계 안에 살고 있음을 보여주며 물었다. 이렇게 감정을 흡수해 버린 채 울림 없이 살아가는 삶이 과연 ‘살아 있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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