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마음들을 다시 읽다

마중도 배웅도 없이 - 박준

by 레토

창비시선 516


나에게 있어 시인이라는 직업이 주는 이미지는 선입견 속에 있었나 보다. 세상의 한쪽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며 어딘가 나와는 다른 시간대를 사는 사람들. 박준 시인도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을 것이란 생각이 자연스럽게 있었는데 오히려 나와 비슷한 나이를 살고 있었다. 시집을 통해 일상의 흔들림과 슬픔, 관계의 미세한 온도를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포착하는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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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보니 이번 시집은 앞선 작품과의 공백이 7년이라고 했다. 그동안 여러 상실을 겪고 라디오를 진행하며 시와 잠시 거리를 두었다고 한다. 그 모든 것이 이번 시집의 결을 만들었다는 인터뷰 기사를 읽고 나니 어쩌면 시인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다만 조금 더 오래 바라보고 조금 더 천천히 건너가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중도 배웅도 없이 지나가 버린 순간들을 붙잡아 언어로 옮겨놓은 이 시집은 나 역시 모르게 놓쳐온 마음을 하나둘씩 조용히 돌아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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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

나의 슬픔은 나무 밑에 있고

나의 미안은 호숫가에 있고

나의 잘못은 비탈길에 있다.

나는 나무 밑에서 미안해하고

나는 호숫가에서 뉘우치며

나는 비탈에서 슬퍼한다

이르게 찾아오는 것은

한결같이 늦은 일이 된다


엄마에게 도착하는 감정은 늘 한발이 늦다

슬픔, 미안함, 잘못이 각각 나무 밑과 호숫가, 비탈길처럼 전혀 다른 장소에 놓여 있지만 화자는 그 자리에서 늘 다른 감정을 느낀다. 슬퍼야 할 자리에서 미안해하고 미안해야 할 순간에서 뉘우치고 잘못을 바라봐야 할 자리에 서서 뒤늦게 슬퍼한다. 이 엇갈림이 어쩐지 나의 일상과 닮아 있었다. 특히 이런 지각한 감정은 대개 엄마에게 향해 있다. 엄마와의 관계에서는 이상하게 감정이 제때 도착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엔 답답하고 화부터 났다가 어른이 된 뒤에는 괜히 생각이 앞서 말이 어설프게 나왔다. 그러다 집에 돌아와 불을 끄는 순간 미안함이 늦은 밤의 냉기처럼 뒤늦게 스며들기도 했다. 엄마의 표정 하나, 짧은 한마디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새롭게 해석되기도 한다. 그때는 몰랐던 엄마의 피곤함과 외로움이 성인이 되어 돌아보면 슬픔으로 바뀌고 이미 지나간 순간에 붙잡지 못했던 마음들이 뒤늦게 찾아왔다.


이르게 찾아오는 것은 한결같이 늦은 일이 된다는 문장처럼 나에게는 어떤 감정이 충분히 일찍 찾아온 것 같아도 엄마에게는 또 이미 한참 늦어버린 순간도 많았을 것이다. 관계의 오해와 멀어짐은 이렇게 감정이 제시간에 닿지 못하는 곳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늦게 도착한 감정으로 후회하는 딸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엄마에게 가장 필요한 마음을 제 시간에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감정의 지각을 줄이는 일은 어쩌면 진짜 어른이 된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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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거

올해는 비가 잦습니다

서쪽 마을에서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습니다

버린 기억을

테두리처럼 두른 것이

제가 이곳에서

한 일의 전부입니다

끝을 각오하면서도

미어짐을 못 견디던 때였고

온전히 가져본 적 없어

손에 닿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한움큼씩

쥐고 보던 시절이었습니다

틀림없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싶으면

일단 등부터

지고 보는 버릇도

이즘 시작된 것입니다


숨어버린 마음의 시절

‘올해는 비가 잦습니다’라는 문장. 이유 없이 울컥하는 날이 많았던 지나간 어느 순간이 떠올랐다. 별일 아니었는데 괜히 서운해지고 퇴근길 버스 창에 비친 얼굴이 낯설게 보이는 그런 날들. 감정의 날씨에 비가 잦을 때가 있었다. ‘버린 기억을 테두리처럼 두른 것”이라는 구절. 나는 분명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버린 기억을 중심에 두고 그 주변만 맴돌았던 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싫었던 말 한마디를 ‘괜찮아’라고 넘겼지만, 며칠 뒤 양치하다 문득 떠오르며 마음 한쪽이 욱신거렸던 밤.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기억은 나의 테두리가 되어 있었던 거다. ‘온전히 가져본 적 없어 무엇이든 한 움큼씩 쥐고 보던 시절’ 누군가의 작은 관심에도 마음이 먼저 달아올랐고 반대로 조그만 실망에도 과하게 움츠러들었다. 그래서 손에 잡히는 건 뭐든 놓치지 않으려고 관계든 감정이든 너무 꽉 쥐어 오히려 상처가 난 적도 있었다.

‘다가온다 싶으면 일단 등부터 지는 버릇’ 누군가 다가와 밥 한 끼 먹자고 해도 괜히 바쁘다는 핑계를 댄 적도 있고 정작 외로우면서도 먼저 마음을 내주면 상처받을까 봐 다가오는 온기보다 먼저 거리를 두는 습관이 익숙했던 시간들도 있었다. 돌아보면 그것이야말로 나의 ‘은거’였다.


세상에서 숨은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따뜻함에서 숨은 것. 이 시를 읽고 나니, 나도 한동안 그런 시절을 지났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런데 숨는다고 해서 상처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기에 오히려 제자리만 빙빙 돌며 더 외로워졌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 늦더라도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들리면 등을 돌리는 대신 천천히 몸을 돌려볼 용기를 내보려 한다. 은거의 시절을 지나온 지금 비가 잦던 마음도 조금씩 개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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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열까지 다 세고 나면

다시 하나둘 올라야 합니다

설령 높고 험하다 해도

딛고 있는 바닥부터 살펴야 합니다

낮고 천천히 숨을 고른 뒤

걸음을 옮깁니다

다만 이후의 시간에 관해서는

얼마간 생각하지 않기로 합니다

어차피

나의 기억과 나의 망각이

사이좋게 나누어 가질 것들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채 닫지 못한 틈으로

새어 나오는 것들만을 적기로 합니다

“우리의 목소리는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닮아간다” “서리

고 어리는 것들과 이마를 맞대며 오후를 보냈다” “흙과 종

이와 수선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 적이 있었다”

물론 당장 하나의 글로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다가오는 계절의 밤은

세상에서 가장 길며

짙으며 높으며 넓습니다


완성되지 않아도 괜찮을 용기

박준의 시 「설령」을 읽으며 얼마 전 읽었던 『헤세와 융, 영혼의 편지』가 떠올랐다. 헤세가 말했던 ‘말은 가면이다’라는 문장처럼 우리는 삶의 진짜 모습을 설명할 언어가 늘 부족하다. 그래서 인지 이 시의 첫 부분, ‘열까지 다 세고 나면 다시 하나둘 올라야 합니다’라는 말은 삶이 늘 미완의 상태로 반복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듯했다. 한 번 오르막을 넘었다고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해야 하는 순간들. 숨이 가빠오면 멈추고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그런 리듬이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딛고 있는 바닥부터 살펴야 합니다’라는 구절은 헤세와 융의 편지에서 말하던 ‘깊이 내려가는 감각’을 떠올리게 했다. 높은 곳을 상상하기보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자리가 불안정하고 흔들리는 바닥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융이 말했던 무의식의 자리도 결국 지금의 나를 이루는 바닥 같은 것이 아닐까? 결국 어떤 기억은 남고 어떤 기억은 잊힌다. 애써 완벽하게 붙잡지 않아도 삶은 스스로 균형을 잡아간다. 헤세와 융이 서로의 내면을 털어놓으며 완전한 인간은 없다고 말한 장면과 닮아 보였다.

‘새어 나오는 것들만을 적기로 합니다’라는 결심은 글쓰기의 태도이자 삶의 태도처럼 느껴졌다. 완성된 문장과 완벽한 마음을 기다리지 않고 순간의 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 적는 일. 인생은 어차피 완성본으로 주어지지 않으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저 지금의 나를 제대로 마주하는 용기일 것이다. 다가오는 계절의 밤이 ‘길고 짙고 높고 넓다’는 시의 마지막처럼, 남아 있는 시간은 아직 우리가 천천히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하다. 완성되지 않은 채로 살아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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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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