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겨울을 혼자 썼다 - 장정욱
시인수첩 시인선 065
창문 너머로 내려다본 풍경은 노란빛과 따뜻함이 남아 있어 아직 온전한 가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산책을 나서자, 겨울이 코앞까지 닿아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차가운 공기와 바람은 생각보다 거칠었고 나뭇가지는 어느새 앙상하게 비어 있었다. 같은 계절이라도 창문 속에서 바라본 가을과 몸으로 느낀 겨울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거리가 있었다.
그 길로 도서관에 들어서서 그런지 서가를 천천히 걷는데, ‘겨울’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장정욱 시인의 『넓은 겨울을 혼자 썼다』 는 차가운 계절을 조용히 통과하는 마음의 기록처럼 다가왔다. 기억과 상처는 종종 우리를 한겨울 한가운데에 세워둔다. 시인은 부재에서 오는 고독과 지나간 시간 속에 남은 균열들을 표현하였다. 얼어붙은 마음을 오래 응시할수록 그 틈에서 아주 미세한 온기가 피어오른다는 사실도 보여주었다. 어쩌면 우리는 각자의 문장으로 계절을 견뎌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p.46
바람 겨울
알아들을 수 없는 겨울이 흘러들었다.
귀마개를 두른 그림자가
자주 눈 밑을 오갔다.
바람 겨울을 들여다볼 때면
울음을 그치지 못한 영혼들이 서 있는 듯했다
입김으로 얼굴을 지우려 하면
하얗게 쏟아지는 골목
그중 하나는 신발을 끌면서 걷는데
반결음 늦는 소리가 동생 같았다.
뒤축이 닳아버린 저녁
기울어진 눈발
딱딱한 목에
흰 목도리를 두른 인형이 자주 꿈속에 나타났다.
캄캄한 몸은 어디에서 환해질는지
거울은 휘청거릴 뿐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엄마는 골목의 문을 잠갔고
나는 밤새 불 켜진 십자가에 마음을 다 주었다
따뜻함 속에 감춰진 외로운 겨울
시 속에서 겨울은 단순한 추위가 아니라, 이유조차 분명하지 않은 불안으로 다가왔다. 특히 귀마개를 두른 그림자라는 표현이 인상 깊었다. 귀마개는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는 따뜻한 물건이지만, 그만큼 외부의 소리를 차단한다. 보호와 고립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중적 상태가 하나의 이미지에 담겨 있다. 흰 목도리를 두른 인형도 마찬가지다. 포근하고 순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온기가 없는 존재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붙잡은 위안이지만 그조차 실제로는 생명이 없다는 사실이 더 큰 쓸쓸함을 전해주었다.
시인은 이러한 상징을 통해 누군가 곁에 있어도 이어지지 않는 관계, 말을 걸어도 닿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보여준다. 마지막에 ‘엄마는 골목의 문을 잠갔고 나는 밤새 불 켜진 십자가에 마음을 다 주었다’라는 구절은 기대고 싶은 곳은 닫혀 있고, 결국 절대적인 무언가에 마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겨울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이 시는 스스로 원치 않았던 계절 한가운데에 서 있던 기억을 통해 여운을 남겼다.
p.86
눈사람
상상을 입혔더니
눈꺼풀이 따뜻해졌다
나뭇가지마다
다정한 이파리들
까닭 모를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눈송이와 악수하는 아이
붉은 털목도리가 생일보다 길었다
커튼을 젖혀 소원을 밖에 내놓았다
하얀 페달을 밟으며
동네 한 바퀴
돌아 나오는 자전거
호호 곱은 손에
벨을 달아 입김을 불어주면
불어나는 눈덩이
오늘의 소원은
함박눈에 길들여진
착한 눈,
사람이 되어가는 것
겨울을 따뜻하게 만드는 상상
「눈사람」은 겨울 풍경 속에서 아이가 상상과 놀이를 통해 세계를 따뜻하게 바꾸는 과정을 담아낸 시다. 눈사람에게 눈과 표정을 그려 넣는 순간, 차가운 눈덩이는 마음을 가진 존재가 된다. 시 속의 풍경들은 아이의 손길이 닿는 대로 생기를 얻는다. ‘눈송이와 악수하는 아이, 커튼을 젖혀 소원을 밖에 내놓았다.’ 같은 구절은 아이의 상상이 바깥 세계와 연결되며 확장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상상하고 소망하는 행동 자체가 인간다움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서울·경기·강원과 달리 경상 지방에서는 눈을 보기가 쉽지 않다. 그중에서도 부산은 특히 겨울에도 눈과 거리가 멀다. 영하의 추운 날씨에도 부산만 눈이 내리지 않는 이유가 도대체 뭔가 싶어 검색해 본 적도 있다. 부산 사람들에게 눈이 내리는 날은 정말 귀하고 특별하다. 지금 사는 곳이 행정구역상 부산은 아니지만, 차로 3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라 체감은 여전히 비슷하다. 눈사람을 만들고 싶다면 어쩔 수 없이 눈썰매장으로 향해야 한다.
실제로 눈사람을 만들어보니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크기를 키우려면 우선 작은 눈덩이를 단단히 굳혀야 하고, 겨울왕국의 올라프처럼 눈, 코, 입을 만들어줄 도구도 필요하다. 그러고 보면 눈사람을 만드는 그 모든 과정이, 어쩌면 마음을 가진 존재로 자라나는 길과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차가운 겨울에도 아이들과 어른들 그 누구도 상관없이 상상과 손길이 닿는 곳에는 온기가 피어오를 것이다.
p.96
얼음의 맥박
물결이 들어오다
그만 얼어버렸다
나의 맥박은 잎맥도 없이
긴 잠에 갇혔다
금 간 풍경은
몇 개의 길이 되어 겨울 끝을 이어 붙였다
간간이 나뭇잎 빠져나간 자리엔
돌들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녹아내려
몇 겹의 어둠이 젖어 들었다
새로운 얼음이 덧대어지고
오후가 되면 물컹, 너의 입김이 언 자리를 녹였다
나뭇잎 하나가
지느러미 없이 얼음 속을 헤매고 있었다
얼어붙은 맥박이 다시 뛸 때 흐르기 시작하는 나뭇잎
이 시는 마음이 얼어붙은 상태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흐르고 움직이던 물결이 갑작스레 얼어버렸다. 감정의 흐름이 멈추고 살아 있다는 증거인 맥박마저 긴 겨울 속에 갇힌 상태가 되었다. 풍경 곳곳에 생긴 금은 불안과 상처를 드러내지만 동시에 겨울의 끝을 이어 붙일 가능성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온기가 닿는 순간 아주 조금 녹아내리는 모습은 완전히 얼어붙은 마음속에도 여전히 호흡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결국 이 시는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흔들리는 감정과 미세한 희망의 흔적을 함께 그리며 멈춘 듯 보이지만 여전히 뛰고 있는 마음의 맥박을 느끼게 해주었다.
짧은 한마디에 속이 울렁대고 얼굴이 화끈거리게 되는 일이 부부싸움인 것 같다. 마주 앉아 식사하려니, 위장의 활동이 멈춰버린 듯 먹은 것이 그대로 체하고 만다. 그 상태로 서로 입을 닫으면 더 깊은 우울의 우물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사소한 일 하나가 눈덩이처럼 커져 상상 속 상처까지 만들어낸다. 예컨대 나이가 들어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여전히 같은 이유로 서로의 마음을 다치게 할 것 같은 불길한 미래까지.
얼어붙은 마음에 더 피곤해지고 말 한마디조차 힘들어지는 날이 있다. 그러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온기 하나가 그 얼음을 조금씩 녹이기도 한다. 둘 중 누가 잘못한 것과 상관없이 누군가 먼저 용기를 내어 건네는 따뜻한 한마디, 그것 하나면 다시 맥박이 뛰기 시작한다. 멈췄던 위장은 활동을 재개하고,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 밖으로 마음이 걸어 나온다. 마음 속 나뭇잎 하나가 얼음을 탈출해 물결과 함께 흘러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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