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찾으시던 시가 도착했습니다 - 김태은
‘기다리던 시’이라는 이름의 제목. 이 시집을 마주하면 마치 오래전 잊고 지냈던 감정이 제자리를 찾아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많은 말을 하려다 말고 감정을 억지로 덮어두기도 한다. 그때마다 마음 한쪽에 ‘언젠가 꺼내야 할 문장들’이 쌓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김태은의 시인은 바로 그 문장들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상적 언어들로 대신 건네는 듯했다. 시를 읽다 보면 지나간 계절 속에서 말하지 못한 마음과 끝내 전하지 못한 문장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시집은 ‘여기, 당신이 찾던 마음이 있어요’ 하고 문장들을 선물처럼 조용히 놓아두었다.
p.13
찾으시던 시던 시가 도착했습니다
낡은 우편함 안에
엷은 바람 하나가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질문 몇 줄이
오래 접힌 편지처럼
작게 숨 쉬고 있었습니다
괜찮으신가요
아직 거기 계시는가요
나는 아무 말 없이
종종걸음으로 봄을 건넜고
몇 겹의 계절을 되감아 눕힌 끝에야
비로소 이 글자를 씁니다
그대가 기다리던 시는
그날 두고 간 마음의 조각
잊힌 기억의 가장자리에
말없이 남겨진 문장으로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나는 그 위에
내 마음 하나를 접어
조용히 포개어 올립니다
별이 늦게 뜨는 계절이지만
오늘은 조금 일찍 띄워드립니다
님,
찾으시던 시가 도착했습니다
늦게 도착한 편지처럼 말이 되지 못한 감정들
요즘은 우편함을 열어 반가운 편지를 받는 일을 상상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우편함을 열면 광고 전단지 또는 관리비 고지서가 들어 있는 일이 대부분이다. 기대한 건 없었지만 또 막상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늘 마음을 비우게 한다. 평범한 일상도 비슷한 것 같다. 특별한 일 없이 하루는 바쁘게 흘러가고 해야 할 말들은 자꾸 미뤄지기 마련이다. 괜찮냐는 안부도 잘 지내냐는 말도 마음속에서만 맴돌다 사라진다.
낡은 우편함 속에 남아 있던 엷은 바람처럼 나 역시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넣어둔 감정이 있었던 건 아닐까? 묻지 못한 질문들이나 전하지 못한 말들. 시 속의 ‘질문 몇 줄’은 꼭 내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제때 말하지 못하는 경험을 생각보다 많이 하게 된다. 감정은 그 순간 너무 생생해서 말로 만들어 지기 힘들고 시간이 지나서야 온전한 문장으로 떠오른다.
이 시는 누군가에게 보내는 시로 보이지만 동시에 나 자신에게 늦게 도착한 편지처럼 느껴졌다. ‘찾으시던 시가 도착했습니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지금의 내가 아니라 예전의 나에게 도착한 시 같았다. 바쁘게 지나온 날들 속에서 놓쳐버린 마음 하나를 조심히 꺼내 다시 건네받는 기분이었다. 괜찮았냐고? 잘 지냈냐고? 묻고 싶은 얼굴들, 그 말을 건네고 있는 상상 속 과거의 내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p.60
젓가락 끝에 남은 온기
오후 네 시
기울어 가는 햇살 아래
작은 분식집 창가에 앉는다
하얀 김 피어오르고
붉은 국물 속 떡은
묵묵히 온기를 품은 채
내 앞에 놓인다
참았던 마음이
천천히 끓어오른다
너와 마주 앉아
젓가락을 맞대던 어느 오후
네가 건넨 떡 한 조각에
심장이 조용히 젖어 들던 기억
국물에 젓가락을 담그다
문득 떠오른다
너의 입술도
가끔 저런 색이었다는 걸
함께였던 자리에
이젠 바람만 머물고
너의 웃음 대신
뜨겁고 매운 마음 하나
입안에서 울컥 피어난다
낡은 젓가락 하나
시간을 건너
조용히 내게 스며든다
떡볶이를 좋아했던 친구, 잘 지내고 있을까
이 시를 읽으며 누군가는 지나간 사랑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고등학생 때 함께했던 친구 한 명이 떠올랐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우리는 이상하리만큼 잘 맞았다. 함께 공부하고 학원을 오가며 간식을 사 먹는 평범한 시간이 유난히 즐거웠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 시절의 기억은 지금도 따뜻하게 남아 있다.
2학년이 되어 문과와 이과로 진로가 갈리면서 우리는 다른 층의 교실을 쓰게 되었고 자연스레 마주치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거리 따위가 문제 되지 않았다. 대학도 전공은 달랐지만, 같은 학교에 다녔고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결혼을 한 뒤에도 우리는 주말이면 시간을 내어 얼굴을 보곤 했다. 서로의 삶이 바빴지만, 우리의 관계가 쉽게 끊어질 것 같진 않았다.
그러다 아이를 낳고, 남편의 직장 이동으로 이사를 하면서 내 일상은 급격히 달라졌다.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갔고 누군가의 안부를 챙길 여유조차 없었다. 그 무렵, 그 친구에게도 쉽게 꺼내기 어려운 고민이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나 역시 내 삶을 감당하기에 벅찼고 그렇게 우리는 누구의 잘못도, 특별한 사건도 없이 서서히 멀어졌다.
생각해 보니 우리는 참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떡볶이를 좋아했던 취향 하나로도 충분히 오래 웃을 수 있었던 사이였다. 어쩌면 나이가 들어 할머니가 되어서도 연락하며 지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시를 읽으며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잘 지내고 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냐고 묻고 싶다. 이 시는 한때 내 삶에 깊숙이 머물렀던 사람을 조용히 떠올려볼 수 있는 감사한 시간을 선물해 주었다.
p.129
느린 웃음의 계절
느리게 웃는 계절이 왔다
재미는 따뜻한 빛처럼
늦게 도착하고
눈송이 하나가 웃기까지는
창밖을 다섯 번쯤
바라봐야 한다
귤 하나가 완벽해지려면
햇살에 세 번쯤
몸을 뒤척여야 한다
처음엔 그저 “춥다” 말다가
두꺼운 담요에 파묻혀
피식, 웃긴 생각 하나 꺼내 본다
입꼬리는 이불 안에서 먼저 펴지고
웃음은 김처럼 은은히 피어난다
가끔은 김 서린 창문에
‘ㅋ’ 하나 툭 그려 두고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하얗게 물든 거리
또끼처럼 뛰노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그게 왜 그렇게 귀엽고
괜히 재밌는지
조용히 입안으로 웃음이 밀려온다
요즘은 하하 웃기보다
느리게 머무는 미소가 많아졌다
빨리 재밌어지지 않아도 괜찮다
천천히 도착한 웃음은
그만큼 오래 남는다
귤 향기 가득한 거실
모락모락 피어나는 착잔 위
고요하게 앉은 따뜻함 속에서
뭉툭한 장갑에 꼭 쥔 손안
그 조용한 재미는
여전히 손끝 어딘가에 남아 있다
귤 향기 번지는 겨울 저녁에 마주한 온기
겨울이 되면 따뜻한 이불 속에 몸을 파묻고, 옆에 한 바구니 가득 쌓아둔 귤을 까먹던 시간이 떠오른다. 손끝이 노랗게 물들 때까지 하나를 먹고 또 하나를 까던 그 겨울이 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는 그렇게 귤을 먹는 일이 거의 사라졌다. 그렇게 느긋하게 앉아 있을 시간이 없어진 것일까?
그런데 아이의 방학이 시작되면서 그 풍경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담요를 덮고 책을 읽는 아이 옆에 귤껍질이 한가득 쌓여 있는 모습. 예전의 나와 똑 닮아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웃겨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자, 아이는 왜 웃느냐고 물었다. 옛날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그렇다고 하자, 아이는 겨울마다 뒷 베란다 세탁기 위에 올려둔 귤 한 박스가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고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귤을 가지러 오가는 게 겨울의 재미라고.
아이의 웃음은 담요 속에서 피어오르는 귤 향처럼 조용히 번졌다. 아빠는 귤도 살찐다고 농담 섞인 장난을 건넸지만,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또 하나를 까먹었다. 생각해 보니 요즘 나를 둘러싼 대부분이 너무 서둘러 지나가는 건 아닐까 싶다. 웃음마저 빨리 즐거워야 하고, 금방 반응해야 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 하지만 좀 천천히 흐르는 것도 좋다. 겨울 저녁, 귤 냄새가 남은 거실에서 여유 있는 온기를 느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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