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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준호 Jul 13. 2021

그렇게 어른이 된다

<초원의 빛>

나는 불확실성의 원리를 믿는다. 

인간은 모든 걸 예측할 수 없고 때때론 상식을 벗어난 결과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 채 살아가는 게 삶이다. 하지만 가끔 사람들은 미래를 정해놓은 것처럼 확신할 때가 있다. 바로 내 아이를 키우게 되는 순간이다. 사람들은 그때부터 각자의 방식대로 육아를 시작한다. 각자가 그리는 미래에 맞히어 내 아이를 그려나가는 것이다. <초원의 빛>은 그 길을 이탈한, 자유 의지를 가진 기초 분자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이야기이다.


대공황이 일어나기 직전인 1928년 미국 캔자스에서 시작하는 <초원의 빛>은 사랑과 작별이 반복되는 버드와 디니의 인생 한 토막을 잘라내어 보여준다. 절절히 사랑하다가도 어느 순간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던 씁쓸한 한 토막이다. 나이테라면 너무나 주름져 그 세월을 다 읽지도 못할 것 같다. 마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부잣집 도련님 버드와 조금은 가난하지만 순결하고 아름다운 디니의 사랑은 정말 절절했다. 목숨을 바칠 만큼 사랑했지만 결국 작별하고 만 서사는 뼈아프게 아린 슬픔을 준다. 다만, 그들이 작별을 고한 것은 각자의 마음이 아니었음을 안다. 그들이 작별을 고한 건 각자의 삶, 돌이킬 수 없는 초원의 빛이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 마음도 있나니. 신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버드와 디니는 보물을 열어보지도 못한 채 깊은 곳에 묻어둔다. 그들에게 작용한 환경은 마치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여자는 여자답게 순결하고 정숙해야 해. 디니는 어머니로부터 위 내용을 불문율처럼 배웠다. 버드 역시 아버지처럼 성공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양 살아간다. ‘플라스틱. 이제부턴 플라스틱이야.’ <졸업>의 어른들처럼 이들 역시 불확실한 세상에 너무나도 확실하고 저명한 길을 제시한다. 개성, 취향과는 관계없이 사회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강요하는 질서와 통념들을 말이다. 이제 막 사랑을 깨달은, 하고 싶은 것이 넘쳐나는 버드와 디니는 개인의 감정조차 사회의 통념에 가로막혀 더 나아가질 않았다. 경제적인 여건까지 중압감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디니가 아니라 세상이 미친 게 아닐까 싶다.


억압된 고통들은 응축되어 사운드와 여러 색채가 오가는 파티 장면을 통해 폭발한다. 파티장을 뛰쳐나가는 버지니아, 교실 밖으로 도망치는 디니와 같이 격정적이고 급박하게 물감이 한 번에 번지듯이 표현한다. 어느새 극 중에서 사라진 버지니아는 억압 속에서 자유를 찾아 날아간 아브락사스 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마을의 여성관을 깨부순 채 남자들에겐 악이 됐고, 디니의 롤모델이 된다. 디니 역시 그녀의 삶을 쫓아가지만, 결국 순리대로 살아간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당연한 폭포처럼 말이다.


버지니아가 알을 깬 새라면 디니는 날개가 꺾여 박제되어버린 천재다. 똑똑함은 부각되지 않고 우아한 여성의 자세만이 남는다. 미워했던 어머니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녀의 교육관이 잘못됐다고 하지 않는다. 디니는 그렇게 어른이 된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꽃의 영광에 한없이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강한 힘으로 남는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은 남아있다. 버드의 한 마디에 얼굴이 일렁일 정도로 남아있다. 그런데도 그에게서 멀어질 수 있다. 어른이니까, 그런 어른이어야 하니까. <초원의 빛>은 일종의 성장 서사이다. 웃음 속에 울음을 지닌 디니의 성장. 디니와 버드는 사랑이라는 상처를 흔적으로 남긴 채 성장한다. 이탈했지만 다시 걷는다.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각자의 원형을 그려나간다. 그렇게 세월이 흐른다.


버드와 디니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할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수많은 의문 역시 찬란한 빛, 꽃의 영광, 초원의 빛으로 남는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을 보자. 그 속에서 노을 진 석양을 바라보며 우리도 외친다.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오히려 강한 힘으로 남으리. 사랑의 상처와 흔적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 것만 같다.

디니, 있잖아, 아직도 버드를 사랑하는 것 같아?

초원의 빛이여.

초원의, 빛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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