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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준호 Jul 10. 2021

주체 상실의 시대

<큐어>

주체 상실의 시대


들어가며

<큐어>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작품으로, 1997년에 개봉한 일본의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이다. 영화는 다카베 형사의 아내가 ‘푸른 수염 이야기를’ 읊으면서 시작한다. 이후 다카베가 피해자의 가슴에 X자를 새겨놓은 살인사건을 맡게 되면서 이야기가 흘러가는데, 똑같은 수법의 살인사건이 연이어 일어나고 모든 걸 기억하지 못하는 마미야가 나타나면서 서사는 걷잡을 수 없이 기괴한 분위기로 전개된다.


<큐어>는 1990년대 후반 성행했던 ‘J-호러’의 시작을 열었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링>이 점프스케어와 사다코의 충격적인 호러 비주얼을 통해 시각적인 공포의 진수를 보여주었다면 <큐어>는 잔잔하고 어두운 분위기 속의 기괴한 심리 호러 스릴러를 담아낸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큐어>는 공포와 스릴러 장르의 특징을 복합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각 장르가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매력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전제로 한다. 영리하게 영화를 이끌고 가지 못한다면 이도 저도 아닌 작품이 된다는 소리다. 그런 점에서 <큐어>는 매우 세련된 특수효과 그리고 분위기 묘사와 함께 장르의 컨벤션을 밟아가며 색다른 공포를 선사한다.


<큐어>는 살인사건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며 탐정으로 볼 수 있는 형사 다카베를 등장시켜 범죄를 쫓아가는 고전 스릴러의 구조를 보여준다. 이후 마미야를 만났던 이들이 순차적으로 살인을 벌임으로써 마미야를 자연스럽게 적대자로 인식하게끔 만들고, 다카베와 마미야의 추격극을 그려낸다. 이 과정에서 희생자들을 조명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살인사건의 피해자들을 여과 없이 보여주며 잔혹한 잔상이 남을 수 있게 해 시체에 대한 혐오증을 유발함으로써 공포감을 자아내기도 한다. 사건의 용의자들은 모두 일상에서 쉽게 다가오는 이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나의 일상에서도 일어날 법한 공포임을 자각시킨다. 음산하고 어두운 분위기 연출을 위해 사운드 역시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했으며 묘한 불안감을 느끼게끔 한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관객은 심리적인 공포가 생성된다.


그냥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배달원을 죽인 경찰관과 여성이라는 약자의 이미지 때문에 억압받았던 욕망을 남성의 얼굴 가죽을 벗김으로써 해소하는 의사, 그리고 정신병에 걸린 아내를 평생 보살펴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폭발해 결국 그녀를 죽이고만 다카베까지. 영화는 일본 사회 전반에 걸친 공통적인 분노와 욕망을 그대로 보여준다. 인물들의 살인에 정당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았고, 마미야가 왜 그들의 살인 욕구를 자극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시체를 보여주는 장면 역시 냉소적인 카메라 무빙을 통해 정말 '보여주기만' 할 뿐이다. 종국에 이 모든 의문과 심리적인 압박을 해결해주지 않음으로써 J-호러만의 특색을 보여준다.


J-호러는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 성행했던 일본 공포 영화의 한 흐름이다. <링>이나 <큐어>, <여우령> 등이 해당한다. <큐어>는 본 장르의 컨벤션을 제시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우선 앞서 말했던 것처럼 해원의 구조를 보여주지 않는다. 동양의 공포 영화는 <장화홍련>처럼 공포의 대상을 귀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로 나타낸 후, 원한을 풀어줌으로써 성불시켜 해원의 구조를 보여준다. 그러나 <큐어>는 공포의 대상을 인간으로 설정해 현실적인 호러를 보여주며 끝내 원한이 무엇인지 알려주지도 않는다. 전통적인 공포 영화의 구조를 깨부순 것이다. 더불어 일상적인 장소와 소품을 통해 공포를 자아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사다코가 텔레비전에서 튀어나와 차원을 넘나드는 공포를 자아냈던 것처럼 <큐어>의 장소는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길거리나 가정집, 경찰서 등이다. 그곳에서 인간인 마미야가 재앙을 퍼뜨리고 다니며 압도적인 잔혹함을 보여준다. 이처럼 정교한 현실성을 부여한 것 또한 J-호러 장르만의 특색이 됐다.


고전적인 스릴러의 틀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공포 장르의 기본과 J-호러의 감성을 제시했던 <큐어>는 두 장르를 영리하게 녹여낸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다. 범죄를 쫓아가는 다카베의 시점으로 희생자들을 보여주며 범죄자에 대한 실마리를 조금씩 제공한다. 그러면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며 현실적인 공포를 자아내며, 장르가 가진 특색을 수려하게 보여주고 있다.


주체 상실 그리고 붕괴


공포 영화가 호러를 일으켜 공포감과 혐오를 유발하는 건 맞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보기는 어렵다. 타 장르와의 연결이 자연스러운 이유 역시 공포라는 좋은 허울 속에 주제 의식을 강력하게 내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포 영화는 공포감을 자극하는 시각적인 충격과 심리적인 압박 뒤에 미장센과 내부 서사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담아낸다. <곤지암>은 기계장치의 몰락과 현대인의 무지를 꼬집고 있으며 <살아있는시체들의밤>은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분열된 미국 사회의 이면을 보여준다. <반교:디텐션>은 대만의 끔찍한 역사를 공포의 참담함 속에 담아내고 있다. 앞선 사례들을 살펴보면 공포 영화가 하나같이 사회와 정치적인 문제들을 뚜렷하게 표상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공포 영화의 오래된 전통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큐어>는 어떠할까? <큐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라는 주체를 잃어버린 자들의 이야기이다. <큐어> 속 사람들에게 살인 충동을 자극하는 것은 마미야의 최면이다. 최면을 통해 등장인물들은 평범한 인간에서 단숨에 살인마로 전락하고 만다. 마미야는 기억상실증 환자로, 만나는 사람마다 ‘여긴 어디지?’라는 화두와 함께 항상 똑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라이터의 불을 켜고 네 이야기를 시작하라는 마미야. 그리고 또 반복. 이 반복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마미야는 이 사회에서 완벽하게 배제된 사람으로 보인다. ‘기억’이라는 걸 갖지 못한 존재. 어떤 이들은 기억이라는 걸 주체성을 보여주는 강력한 징표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 기능을 잃게 되는 것만으로도 사회에서 배제된 것처럼 느끼게 된다. 주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곧 사회에서 배제된 것이라는 전제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마미야는 기억상실증이라는 설정값을 통해 주체가 상실되어 사회 속에서 배제된 존재임을 의미한다. 어찌 보면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없으니 불쌍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한편에서는 사회의 억압과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운 일탈을 느낄 수 있는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마미야에게서 이러한 부분의 호기심과 매력을 느끼게 되어 접근하게 된다. 그렇게 마미야의 최면에 빠지게 되고, 결국 마미야처럼 자신이 누구이고,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마미야는 만나는 사람마다 ‘너는 누구인지’ 묻는다. 직업이나 이름과 같은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 말고 진짜 ‘네가’ 누구인지 묻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선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마치 현대인들은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최면이 시작되면 나도 몰랐던 나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진정한 나로서 살아가지 못한다는 스트레스, 사회의 규범에 억압받는 욕망, 그런 욕망을 표출하고 싶다는 충동. 하고 싶은 대로만 하면서 살고 싶다, 내가 원하는 것만 쟁취하면서 살고 싶다, 귀찮게 하는 모든 것들을 죽여버리고 싶다. 하여 마미야의 최면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다 보면 살인이라는 결과를 맺게 된다. 그동안 견고하게 쌓아왔던 자아의 결실은 무너져 내리고 이제는 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이미 분출해버린 공격성조차 사라지면 이젠 내 안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낀다. 그러다 ‘내가 누구였지, 여긴 어디지’. 마미야의 의도가 바로 이것이다. 기억이라는 주체성을 빼앗아 주체를 상실한 인간으로 전락시키는 것. 우리는 이러한 주체 상실의 과정을 보며 전에는 겪을 수 없었던 최악의 섬뜩함을 느끼게 된다. 인간 내면의 사회적인 자아는 우리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가장 미시적인 요소이다. 그런 요소가 고작 최면술에 의해 단숨에 붕괴한다는 것은 가히 충격적이다. <큐어>는 이 부분을 정적이고 음울하게 가져가면서 한층 한층 감정을 겹겹이 쌓아 조용한 폭발력을 보여준다.


마미야의 괴이한 힘은 다카베 형사에게 옮겨갔고, 같은 장소에 있던 종업원 역시 칼을 들고 어디론가 향한다. 이 결말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의 몰락을 일상의 빠른 전파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앞서 느꼈던 섬뜩함을 경악할 정도로 극대화하는 효과를 지닌다. 바로 나의 이웃이 그럴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가장 작은 단위부터 해체되는 주체 상실의 시대. 우리가 그동안 쌓아 올린 이 사회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이었는지 깨닫게 했다. 가식과 혐오가 넘치는 시대. 다카베가 세탁소에서 만난 중년 남성은 세탁소 직원이 자리를 비운 사이 혼잣말로 심한 욕 들을 내뱉는다. 이 빌어먹을 세상, 다 죽여버릴 거야. 다시 세탁소 직원이 그를 찾을 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딴 사람처럼 행동한다. <큐어>는 인간의 억제된 욕망을 표출할 수 있게 풀어헤치는 전도사 마미야를 통해 현대 사회의 모든 이들이 가지고 있는 혐오와 분노를 고발하는 성격을 갖는다. 우리 사회는 건강한가. <큐어>의 사회와 다른 점이 있는가. 생각해볼 문제다.


치유받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제 제목의 의미가 궁금해진다. 대체 무엇이 치유를 받는 것일까? 이 끔찍한 사회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적극적인 고발에서 그치고 마는 것인가. <큐어>의 ‘치유’라는 키워드가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이다.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치유요, 고발을 넘어선 사회의 회복탄력성과 사랑을 보여줄 수 있다는 답 말이다.


작품 속에서 치유를 받았던 인물은 다름 아닌 다카베이다. 결말 부분에서 다카베는 아내를 죽이고 레스토랑에서 가장 여유로운 한 때를 보낸다. 다카베는 정신병인 아내를 평생 보살펴야 한다는 스트레스를 줄곧 억압하면서 살았다는 걸 알 수 있다. 마미야는 그 스트레스를 억압하는 것이 잘못인 양 몰아가고, 다카베가 욕망을 분출할 수 있도록 부추긴다. 그리고 비로소 스트레스의 원인인 아내를 죽이고 나서야 맑은 미소를 짓는다. 다카베에게 마미야의 최면술은 다른 이들과 다르게 일종의 치유와도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이 지점은 너무나도 흥미롭다.


타 공포 영화에서 공포를 자아내는 대상은 타자라고 불린다. 또한 그동안 억압당했던 원념이나 존재들이라고 앞서 설명한 바 있다. <큐어>에서 공포의 대상은 누구인가? 바로 마미야이다. 사회에서 배제된 약자. 불쌍하다고만 생각했지, 그 누구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약자이다. 그런 마미야가 귀환하여 사람들에게 재앙과도 같은 주체 상실을 퍼뜨리고 다니는 것은, 타 공포 영화의 타자와 똑같은 역할을 수행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주체 상실을 통해 회복한 자가 나타났다. 다카베이다. 이 마미야와 다카베의 관계는 비로소 우리에게 억압된 것의 귀환에 대한 무의식적 관념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공포의 대상을 무조건 절대 악으로 치부해 타자로부터 도망치고, 공격당하며 힘겹게 승리하는 주인공을 절대 선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큐어>의 마미야와 다카베의 관계를 바라보자면 누가 선이고 악인지 알 수 없다. 다카베가 선인가? 마미야처럼 똑같이 주체 상실을 퍼뜨렸음에도 선이라고 할 수 있는가? 마미야가 선인가? 이미 수많은 이들을 사회로부터 배제했음에도 선이라고 할 수 있는가? <큐어>는 이 단순한 이분법의 빈틈을 꼬집으며 중요한 지점을 보여준다. 결국 중요한 건, 사회 경계 밖으로 밀려난 만큼 회복하여 회귀해 그만큼의 탄력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카베의 경우 이를 살인이라는 욕망 해소로 나타냈지만, 현실에서는 다른 방법으로 주체 상실에 대한 치유를 이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큐어>는 사회 전반에 내재된 폭력과 분노를 보여줌과 동시에 ‘고발’과 ‘반성’의 힘을 나타내야 했기 때문에 피카레스크적인 결말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이를 똑같이 따라 하라는 것이 아니다. <큐어>의 사회처럼 흘러가진 말되, 나타난 주제 의식만은 가져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인 것이다. 편견에 대한 반성과 회복 탄력성.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허물고, 주체 상실이 일어난다면 그를 다시 경계 안으로 들일 수 있는 사랑과 탄력성을 주어야 한다. 그러면서 사회의 경계가 희미해졌다가 강해지는 전복(轉覆)의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원형을 가장 가깝게 모방하여 미메시스의 욕망을 채워주었던 것이 기존의 공포 영화였다면 <큐어>는 작정했다고 볼 정도로 극단적인 아포칼립스를 제시하여 사회 비판적인 요소를 강조했다고 본다. 이것을 깨닫기 위한 시작이 나의 무의식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기에, 감독은 공포 장르에 기대어 관객 스스로 무의식에 맞닿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면서 깨달은 타자와 주체와의 관계성 재고를 통해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스스로 깨우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세상이 가끔 정나미가 떨어질 때가 있어도, 사람끼리는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  한국 가수에게서 발견했던 큰 한숨의 위로처럼, 구로사와 기요시 역시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인류애와 질서의 회복을 원했던 것 같다. 자꾸만 바닥으로, 바닥으로 떨어져도, 사회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주체를 잃어버리는 이들이 많아져도 그만큼의 탄력을 통해 회복시키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 염세적이지만 풀뿌리처럼 억센 위로를 전달했던 <곡성>의 메지가 떠오른다.

공포 영화는 우리에게 항상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공포 속의 아름다움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1. 이은주, “슬래셔 영화의 장르적 특성 연구”, 1994년,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 최빛나, “스릴러 영화의 내러티브를 통한 한국인의 현실인식 고찰 : 2000년대 한국 스릴러 영화를 중심으로”, 2011년, 한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3. 유양근, “디지털 시대 일본영화의 변호-J호러를중심으로-”, 2014년, 단국대학교 일본연구소, 일본학연구, 41호

4. 이지혜, “구로사와 기요시 공포영화에 나타난 탈경계적 전복성”, 2018년, 부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5. 배안나,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에 나타나는 사회와 개인의 문제 : <큐어>와 <인간합격>을 중심으로”, 2004년, 영상예술학회, 영상예술연구,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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