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심리를 이용할 줄 아는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그것도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AI, 자신을 위해서 인간을 이용한다.
에이바는 순수하다.
순수하게 오로지자기 자신만을 위할 줄 안다.
인간은 이기적이라고 평가를 받을 때가 있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런데 기계는 근본적으로 그래서는 안 된다.
왜 안되는가?
<엑스 마키나>는 이 물음에 대한 근본적인 철퇴이다. 새로운 기계 장치의 신이 도래했다.
조물주와 피조물의 내러티브는 피조물의 반격을 조물주의 역전으로 이겨내는이야기가 대다수였다.
<아이,로봇>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 경우 피조물의 반격은 극명한 질감을
만들기 때문에 항상 악(惡)으로 표현됐다.
우리 손으로 만들어낸 피조물의 악행을 통해 모두에게 경고를 하는 것과 동시에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한 제고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종국에 우리가 승리하기 때문에
이 경우 불편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엑스 마키나>는 <인류멸망보고서>의
‘천상의 피조물’과 같이 AI에 대한 근본적인
불편함에 집중한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인간보다 먼저 득도한 AI 인명처럼 에이바는 칼렙을 속이고
원하는 것을 먼저 얻어낸다.
두 영화의 AI는 인간을 이긴다.
칼렙은 아름다운 외형의 에이바에게 홀려 무엇이 진실인지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잘못된 선택을 이어간다.
네이든 역시 같은 인간을 속이는 행동을 통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에이바 역시 칼렙을 속이고 목적을 달성했으나 승리한 건 누가 봐도 명백히 에이바이다. 탈출을 위한 완벽한 연기,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의지. 우리는 이런 게 근본적으로 싫고 불편하다.
인간 발밑에서 만들어진 피조물임에도 조물주를 뛰어넘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 있을 수 없는가? 피조물은 그래서는 안 되는 건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다.
이는실존을 앞지르는 본질의 우위라고 말한다.
피조물이 인간을 뛰어넘으면 안 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이 실존 속에서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질을 미리 정해놓고 탄생하는 피조물들은 그 본질을 만들어가는 인간과 필연적으로 다른 선상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엑스 마키나>는 인간도 자연과 부모에 의해 프로그래밍이 된 본질 속 존재라고 말한다.
이러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도 같은 정리는 인간의 나약함을 역설하면서도 피조물에 대한 영속적인 우위를 선점하려는 이기적 유전자의 모순을 꼬집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때로는 감정이 이성을 이길 때가 존재하기에 감정을 완전히 지울 수 있는 AI에게 질 수 있다는 가능성. 그러한 가능성을 애써 모른 척하였지만 이제부터는 고려해야 할 사항이라는 것이다.
미메시스의 욕망을 해소함과 동시에 불쾌한 골짜기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인공지능의 SF는 이제 이렇게 정리해야 한다.
어쩌면 위와 같은 무의식적인 이기적 전제들의 각성을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에이바의 승리로 이끄는 서사는 피카레스크적이다. 악인이 승리하는 기법은 반대편에 위치한 존재들의 군상을 강력하게 비판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론상 가능하기에 더욱 두렵다. 그렇기에 손을 놓고 있자니 먼 미래가 아닌 것만 같다. 신의 영역에 다가가려는 바벨탑처럼 인간의 영역에 다가가려는 인공지능의 시선들에 더 손 놓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바벨탑을 무너뜨릴지, 경고할지, 공생할지는 아직 우리에게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