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이 급한 사람과의 대화에서, 언젠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말이다. 사람과의 대화도 나름대로 스토리라 살을 붙이고 붙이다 보면 불어나기 마련인데
이 사람들은 그 속에서 알맹이만을 찾아내려 한다.
<패터슨>을 보면서 그런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대체 언제 사건이 일어나는지 궁금했다.
흥미롭게 다가올 만한 주제는 언제 튀어나올지 궁금했다. 대체 저 남자의 일상이 뭐가 중요할까. 문맹이 된 듯했다. 이 영화의 언어를 전혀 읽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새 두 번째 관람. 거꾸로 들렸던 영화와 제대로 마주하니 어느새 시를 읽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빗물이 똑 떨어지는 듯했다.
처음 영화를 볼 때, 얼마나 시계를 보았는지 모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보는 영화가 대세라던데, <패터슨>은 시간 가는 줄 알고 보는 영화로 다가왔었다. 버스기사인 패터슨씨의 쳇바퀴 굴러가듯 굴러가는 반복적인 삶의 이야기. 시를 쓰는 것도, 아내와 아침을 맞이하는 것도 모두 반복적이다.
전주만 흘러가는 음악이랄까, 그래서 특별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생각할 수 있게 던져놓은
사건들도 없고, 특이한 서사도 없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가는 두 번째 관람에서 발견됐다.
타 영화를 보면서 기대했던 요소들을 똑같이 적용하여 시청한 첫 번째 <패터슨>과는 다르게, <패터슨>에게만 기대할 수 있는 요소로 관람하니 그것만의 특별함을 발견하려는 내가 나타났다. 그리고 일반적인 상식과 다른 패터슨만의 매력을 찾게 됐다.
일상에서 특별함을 찾아내려는 하는 것.
대체 나의 일상에서 어떤 감상을 느껴야 할까. <패터슨>을 다시 찾아본 나의 모습과 비슷했다.
그리고 생각들이 떠올랐다. 나의 일상엔
아름다움이 있는가.
나도 패터슨처럼 일상의 다름을 느낄 수 있을까. 일상 속에서 새로운 일이 일어나기는 어려운 것이다. 애초에, 그 일상의 주체인 ‘내’가 똑같이 행동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반면에 패터슨은 ‘시’라는 자아실현의 매개체를 가지고 아주 사소한 변화들까지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주체의 생각이 바뀌자 일상의 리듬이 어느새 변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가 말하고 있는 게 이것 자체라고 생각한다. 반복하건대,
일상에서 비(非) 일상을 발견하는 것,
‘낯선 것’을 발견하는 것.
이러한 패터슨의 은은한 고백들이 내 마음을 울리기 시작했다. 드러나지 않는 고백이 얼마나 수려한지. 일본인 시인을 만나고 아하를 외치는 패터슨처럼, 두 번째 관람이 끝난 후 내 머릿속에서도 아하, 새로운 변주들이 마구 샘솟았다. 가장 손쉽게 서사를 찾을 수 있는 건, 다름 아닌 내 삶이었다는 것을. 일상의 반복에서 얼마나 많은 변주를 일으킬 수 있는지 새롭게 깨달았다.
그래서 이 영화가 시처럼 느껴졌다. 자꾸만 낯선 것을 발견하고 전해주려 하는 시처럼 <패터슨>도 나에게 ‘낯섦’을 선물해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시처럼 잔잔하고 수려하며 아름답다. 고요한 연잎에 빗물이 떨어지고, 흔들리는 잎들의 운율처럼 리듬적이다. 감각적인 새로움이 자꾸만 밀려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패터슨>의 뒷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그런 패터슨이 부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묘한 감정이 들었다. ‘내일 다시 나의 일상을 찬찬히 살핀다 한들,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게 익숙한 것을 좋아하고 낯선 것엔 긴장하기 마련이라, 가장 반복적인 나의 일상을 뜯어보다가 자칫 내가 다칠 수도 있음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벌써 새로운 것을 상상하고 두려워하며 벅차도록 가슴이 뛰는 내 자신이 뜨겁게 다가왔다. 시가 찢기는 어려움이 와도 다시 흘러간 그의 일상처럼, 내 일상의 새로움이 있다면 또 새로운 반복이 찾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