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드라마도 묻어야 할 것 같다
서스펜스 스릴러가 이렇게나 느린 연출을 보여줘도 되는 걸까. 참신함보다 우려가 먼저 생겼었다. 손에 땀을 쥐는 긴박함을 보여주어야 할 스릴러와 느림의 미학이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숱한 우려와 걱정에서 삐그덕대며 출발한 <마당이 있는 집>. 내내 무표정으로 결말까지 보고 있자니 기억에 남는 건 임지연 배우의 짜장면 먹방밖에 없었다. “비밀은 묻어야죠.” 우려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이 드라마도 묻어야 할 것 같다.
지루할 정도로 느린 특유의 연출이 매력이라고 해도 넘어갈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바로 주연 배우들의 균형이 붕괴했다는 점이다. <마당이 있는 집>을 이끄는 두 중심축은 추상은과 문주란이다. 이 드라마의 서사는 입은 옷부터 말로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까지 달라 보이는 두 사람의 공통점에서 출발했고 끝을 맺는다. 그 공통점은 두 사람이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추상은은 가정폭력으로 인해 트라우마가 생겼다. 문주란은 보다 복잡하다. 언니의 죽음을 목격해 생성한 일차적 트라우마가, 뒷마당의 악취로 시작한 의심 그리고 의심 때문에 자기 가족이 고통받고 있다는 죄책감과 맞물려 두 번째 충격을 야기했다. <마당이 있는 집>은 전혀 다른 삶을 살던 이 두 여자가 만나면서 각자의 트라우마를 직면하고 극복, 극복 이후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 중심 서사였다. 이 과정을 추상은은 극적으로 잘 이행했지만 문주란은 그렇지 못했다.
추상은은 트라우마를 제공한 대상인 남편을 직접 살해함으로써 치유의 과정을 거쳤다. 그 이후 남편에게 폭행당해 주눅 들었던 과거와 달리, 5억을 거머쥐기 위해 뒤를 돌아보지 않는 광기를 통해 폭발적인 감정 변화를 보여주면서 파멸로 치닫는 인물의 입체성을 나타냈다. 반면에 문주란은 그 태도가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도 평면적이었다.
그녀가 언니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을 가진 채 정신병으로 몰아가는 남편의 공작이 있었기에 줄곧 나약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가지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심이 확증임을 알게 되는 몇 순간들에서만큼은 감정의 변화를 보여주어야 했다. 그래야 향후 감정이 폭발하는 하이라이트에서 펼쳐지는 문주란의 행동을 납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일련의 사건을 마주해도 감정이 동요한다는 느낌을 전달하지 못했다. 하여 추상은을 배신하는 것처럼 보여주거나 남편을 죽이는 등의 극적 행위가 충분히 납득되지 않았다. 치밀한 계획이 아닌 허술하고 우발적인 행동으로 보인 것이다. 언니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는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문주란은 훨씬 더 처절하게 원망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어야 했다. 재호를 죽이는 계획에서는 추상은만큼 광적인 감정을 통해 모든 걸 내걸었다는 극적 쾌감을 보여주었어야 했다. 어머니의 사과만으로 트라우마가 해결되는 장면은 재호를 살해하는 극복 과정의 설득력을 잃게 했다. 추상은만큼 감정이 폭발했다면, ‘이 인물의 감정의 골이 살해말고는 생각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극단에 치달았구나’ 하고 납득했을 것이다. <마당이 있는 집>은 그러한 변화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문주란이 보여준 극 후반부 모든 행동은 의문밖에 들지 않았다. 모든 순간 고급스러워야 할 문주란의 특성이 발목을 잡았다. 그런 인물이 파멸적인 사건과 맞닿으며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장르에 걸맞은 쾌감을 훨씬 더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도 무엇보다 아쉬운 건 역시 연출의 속도였다. <마당이 있는 집>은 최대 6부작 혹은 4부작으로 압축해도 좋았을 듯하다. 이수민의 존재를 알고 재호의 악행을 파헤치는 서사의 허리가 지루할 정도로 길었다. 그렇다면 정교한 짜임새 혹은 거대한 비밀을 보여줬어야 했는데 그러지도 못했다. 매체를 잘 선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결말을 보여주는 게 더 중요하다. <마당이 있는 집>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