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고문>을 맡은 날

이제는 덕후의 시대인가?

by 지식공장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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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컨설턴트, 고문의 개념을 알고 계시는지요? 경영진 또는 경영의사결정에 깊게 관여하는 조언을 통해, 수익활동을 개선하고, 문제점을 해결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보통 우리나라에서 전문 컨설턴트는 각 분야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나, 고위 정부 관료 출신들이 꽉 잡고 있죠.


다만 해외시장에서는 조금 특이한 컨설턴트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이른바 고문형 창업으로써, 돈보다는 지식과 시간이 많은 사람들에게 선호되는 방법이죠. 이들은 고문의 입장에서 스타트업의 경영에 조언을 해주고, 일정 성과를 얻었을 경우 성과를 얻는 방법입니다.


보통 부업으로써 선호되지만 이 과정을 통해 본인도 또 다른 경험을 얻고, 수익을 챙기기 마련이죠. 한국에선 아예 똑같은 개념은 없고, 그나마 엔젤투자자가 같은 역할을 하는 게 맞나요?


처음엔 책을 읽으면서 꽤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하고 그냥 넘겼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는 꽤 오래전에 <고문>으로 활동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무려 학생 시절에 말이죠. 음, 시기는 IMF를 맞이한 바로 전 해였어요.


2. 당시 저희 동네에는 책 대여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만화를 워낙 좋아하는 저는 끓어오르는 향학열(?)을 이기지 못하고 걸어서 40분이나 걸리는 친구 동네의 책방을 애용했는데요. 그 고난의 행군을 보신 신께서 가엽게 여기신 것인지 (설마요) 걸어서 15분 거리에 새 책방이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그 책방은 만화 마니아 입장에선 참 미덥지 못했습니다. 우선 인기 있는 작품이 없었고, 신간이 없었어요. 그래서 아주머니에게 사정을 여쭤보니, 이분은 그냥 가정주부시고 남편은 원래 대기업 사원이었는데 그 해 5월 (IMF가 벌어지기 한해 저) 규모를 줄이는 과정에서 해고를 당하시는 바람에 그나마 유망하다는 대여점을 차리셨던 겁니다.


보아하니 만화도 안 좋아하시고 책도 잘 모르셔서 그냥 망한 만화방에서 적당하게 인수받은 걸로 가게를 꾸려놓으셨나 봐요. 아내분은 갓 100일 지난 아기를 보면서 가게를 지키고, 남편분께서는 직장을 알아보시면서 종로 5가 도매서점에서 가끔 책을 떼어오시는 식으로 운영 중이었더군요.


솔직히 남을 돕겠다는 정의감이 솟은 건 아닙니다. 단지 기껏 가까운데 책방이 생겼는데 신간은커녕, 내가 좋아하는 만화도 없다는 점에 분노(?)했을 뿐이죠. 그래서 저는 주제도 모르고 (나쁜 버릇인) 조언을 시작해 버렸습니다. 네, 대학 갓 들어간 청년이 말이죠. 지금 생각하면 무슨 용기인지 싶지만요(웃음).



- 남편분께서 책을 2주에 한번 가서 가져오신다고 했는데, 보통 한 주에 인기 신작이 몰아 나올 수도 있으니 효율적이지 않습니다. 총판 서점 몇 곳을 정하시고요, 박카스 한 박스 들고 가서 새로 시작한 사람이라고 인사하고 가끔 찾아가면서 인사를 해두세요. 명함이랑 주소 잊지 마시고요.


그쪽이 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도 책을 많이 팔아야 하니까 신간이 나오면 전화연락을 줄 겁니다. 총판을 여러 곳 다니시면서 그 총판들이 많이 언급하는 책이 모 아니면 도, 즉 많이 팔리는 책이거나 아니면 빨리 처분해야 할 악성 재고일 거예요.


- 좀 불안하시면 여기서 30분 정도 떨어진데 책방이 있는데 한번 가셔서 말씀해보세요. 책방에서 책 떼러 가실 때 같이 가게 해달라고요. 아마 단체로 구매하면 책이 더 싸질 테니까, 좋아할 거예요. 그 정도 거리면 서로 경쟁하기도 힘들어서 경계하지도 않을 거고요(아마도).


이 정도만 해놓고 저는 책을 못 빌려 실망한 마음으로 예전에 가던 40분 거리 책방으로 쓸쓸히 걸음을 옮겼더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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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이런 아늑한 책방이 또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은 모양이지만, 그때는 무조건 대형서점이 인기인 시절이었고 아직 대여점이 성황일 때도 아니었습니다. 사진은 일본의 한 동네 책방.


3. 그로부터 2주 후, 다시 15분 거리 책방을 지나던 저, 매의 눈으로 서가에 제가 좋아하던 아다치 미츠루의 H2신간이 꽂혀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당연히 빌리러 들어갔고 아주머니께서 벌떡 일어나서 반겨주시더군요.


이야기인즉슨 제가 시키는 대로 했더니 도매상에서 새로운 인기 책이 나오면 바로바로 전화해주시고, 또한 옆 동네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해서 지금 만화방 하시는 분들과 함께 우대 가격으로 구입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주시고서 하시는 말씀.


학생, 앞으로 우리 집에서 책을 빌려요. 학생은 우리 가게 고문님이야.
무조건 공짜로 빌려줄게요.


공.짜 (띠리링~!!)


순간 머릿속에 천상의 벨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사태를 냉정하게 파악했습니다. 고작 그 말 한마디 던져놓고 책을 무상으로 대여받는 건 솔직히 내키지 않잖아요? (아니 받으라구)


게다가 지금 생각하면 그분들만큼 선량한 분들이 드물어요. 그 정도 조언으로 이익을 봤다고 책을 공짜로 빌려주시다니요. 장기적인 관점으로 볼 때 이런 착한 가게는 오래오래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으려니까 아주머니께서 한마디 더 하시더군요.


그런데, 책을 들여놓으니까, 손님이 늘기는 느는데 다른 책방처럼 매출은 늘지 않아요.

그쪽은 우리 남편 급여보다 더 버시던데, 혹시 뭐 좋은 아이디어 더 없을까요?


지금에서야 가져다 붙이는 거지만 이때 저는 고문 = 인센티브 지급이라는 비즈니스 모델이 성립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엔 그냥 공짜로 빌리긴 미안한데 잘됐다 싶어 조언한 것이지만요. 그래서 그냥 만화대여점 이용 경력을 활용해서 몇 가지 더 말해버리고 말았죠.





가게 인테리어 및 초도 판촉전략: 가게 앞에 서가가 있고, 그냥 책이 진열되어 있는데 특별한 의미는 없는 것 같아요(그냥 표지가 이뻐서 두셨다고 하심). 저 위에 POP로 이번 주의 신간이라고 쓰신 후에 신간 서적을 앞에 두세요. 그리고 설명을 조금씩 넣어주시면 돼요. 백작 카인 작가 유키 카오리의 신작 천사 금렵구!! 이렇게 적어두시면 사람들이 이 작가를 몰라도 유명 작품이라고 생각할 거 아니에요? 그렇게 하면 신간이 적어도 옆에 POP가 있기 때문에 화려해 보여요.

POP는 좀 비싸더라도 색이 들어간 도화지 (당시엔 디자인 지라는 개념을 몰랐음)에 쓰시면 더 화려해 보여요. 앞에 서가 등 책꽂이가 전체적으로 낡았는데 돈 별로 안 들이시고 화려한 느낌을 주실 수 있고요.


상품전략 : 롱 셀러는 다 갖춰두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드래곤볼, 북두의 권, 시티헌터, 오늘 우리는, 비바 블루스, 란마 같은 책, 출판사가 슈에이샤(集英社), 쇼가쿠간(小学館)이라고 적혀있죠? 이 책들은 일본에서 인기 있는 소년만화잡지(소년점프, 소년선데이)에 연재된 책이라 독자층이 넓어요. 실제로 드래곤볼 같은 책은 제가 초등학교 때 읽었는데 지금 초등학생들도 읽고 있거든요.

또한 김수정, 이은혜, 황미나, 허영만, 이현세 작품은 나이층에 따라서 두루 읽혀요. 인기 작품인 둘리, 날아라 슈퍼보드, 블루, 점프 트리 A플러스, 타짜, 공포의 외인구단은 갖춰두시면 좋고요. 외국작가로는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들, 타카하시 루미코(란마), 유키 카오리, 라가와 마리모(아기와 나) 등의 작품도 꼭 가져다 두시고요(공교롭게도 해당 책들이 거의 없었음).


시장조사 및 판촉 : 그 외에 번외 편으로 앙케트 용지를 붙이셔서 꼭 빌려보고 싶은 책은 무엇인지 데이터를 모아 보세요. 같은 책이면 옆에는 정(正) 자를 넣어서 적게 하시면 되고요.

혹 저번에 같이 공동구매를 했는데 대여가 안되어서 손해 난 책이 있나요? (꽤 된다고 하심) 그러면 그 책들 중 괜찮다 싶은 것을 골라서 그 용지에 적은 후 획을 몇 개 그어주세요. 그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거예요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실제로 많이 빌리기 시작했다고 함).

비슷한 방법으로 새로 샀는데 구입 가격도 회수를 못했다, 하지만 재미있는 책이라면 이 리스트에 직접 쓰시고 획을 몇 개 그어두시면 사람들이 베스트셀러로 생각할 거예요. 혹 그게 걸리시면 그냥 주인장이 추천하는 책으로 따로 뽑아두시고요.


접객 : 뒤에 집으로 들어가는 문 (상가를 임대, 반으로 나누어서 반을 거주공간으로 쓰고 있었음)은 열어두신 이유가 있으신 거예요? (갓 태어난 아이를 재워두고 있어서 신경이 쓰인다고 함)

보니까 요람 침대를 쓰시네요. 저도 아르바이트하면서 배운 건데 손님하고 자주 눈이 마주쳐야 가게로 들어와요. 그런데 집 안쪽만 들여다보시면 보시면 손님이 잘 안 올 거 같지 않으세요? 외면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잖아요?


괜찮으시면 가게 안에 요람을 두시고 편하게 보세요. 가게가 낡았지만 깔끔하게 청소되어 있다는 느낌도 줄 수 있고요(실제로 청소는 정말 열심히 해야 함).


잘 아시겠지만 가게가 워낙 좁아서 공간이 부족하니까 (그땐 마진 원가가 50%라는 개념을 모르던 시절) 책 정가가 3000원이면 300원 받고 대여해서 10번 대여하면 우선 이익이 남잖아요. 그 책이 더 안 나간다 싶음 팔아버리세요. 요즘 여기저기 만화방이 많이 생기는데 그쪽에 파시면 돼요. 가격은 적당히 합의 보셔서 파시면 되고요. 저도 적정 가격은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쇼윈도 유리창에는 커튼을 쳐두시고요, 폐점 시간엔 닫아두셔야, 생활공간이 방해받지 않아요. 그리고 조금 삭막하니 꽃이 있으면 좋을 텐데, 책방이니 선인장 같은 게 있으면 좋을 거 같아요. 싼 건 300원짜리도 있어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분들은 참 마음이 비단결같이 넓으신 분들이셨던 것 같습니다. 갓 대학 들어간 녀석이 하는 이야기를 그렇게 메모까지 해가면서 들어주시다니요. 게다가 그걸 다 한 번씩 실천해보시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책임이 막중했던 겁니다만) 어쨌든 저는 그날 이 정도 이야기를 해드리고, 원하는 책을 빌려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죠.



4. 그 이후 조금 지나서 겨울이 되자, 가게에 생기가 돌았습니다. 원하는 책은 아주머니께서 최우선적으로 빼주셨지만 빨리 안 빌려가면 미안한 상황이 연출될 정도로 회전율이 좋아졌고요, 꽤 빌려가서 서가가 좀 휑해지는 일도 있었죠. 물론 그때는 꽉 채우지는 말되 어느 정도 책을 가져다 꽃아 두시라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까딱하면 망하는 가게처럼 보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위에서 말씀드렸듯, 아기를 가게에서 보시기 시작하셨는데 이게 생각지도 못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애기가 꽤 귀여웠고 바로 옆에 여고가 있어 여고생들이 애기를 보러 몰려드는 바람에 가게가 북적였고, 이게 궁금증을 자아낸 사람들을 유인하는 효과를 낳은 겁니다. 위대합니다. 이쁜 아기의 파워는!!


상황이 이렇게 된 후 어느 날,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저를 반겨주시면서 박스를 하나 주시더군요. 안에 열어보니 패미콤, 슈퍼패미콤, 플레이스테이션 게임들이 한 수십여 개 있었습니다. 이야기인즉슨 정리하는 동네 게임가게에서 거의 거저와 같은 가격으로 불하받았는데 두 분은 게임하실 시간도 없어서 제게 주신다는 겁니다.


온갖 것을 다 받고, 이익을 채우면 내팽개치는 사람이 넘쳐나는 시대인데 이렇게까지 챙겨주시다니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선량하신 분들이었어요. 코끝이 찡해지는 이야기지만 그때 제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이것도 상품으로 파시죠?



- 음 오래된 게임들이 많으니까 개당 5000~10000원에 파시면 싹 나갈 거 같은데요(망한 게임가게에서 얻어온 거라 그 정도면 남는다고 하심). 여기 슈퍼패미콤 곽팩들은 꽤 비싼 거 같은데요? 명작들이니 이건 특별히 붙여서 파시면 될 거 같아요. 후에 괜찮은 비즈니스가 되면 교환금 받고 게임을 바꿔주시면 될거 같아요.


- 어찌 그리 잘 알아? 게임도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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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이 곽팩들은 가져가요.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은데.


그래서 종이봉지를 하나 들고 나온 제 손에는 슈퍼패미콤 곽팩 (당시 거래가로 약 15만 원어치)이 들려있었습니다. 이게 다 선하게 살아온 결과일까요? (퍽!)


이후, 저는 방학을 기점으로 군에 입대를 했고, 2년 2개월 후, 제대하고나니 집이 이사를 가버리는 바람에 그 가게에 들릴일은 없었습니다. 최근에 버스를 타고 가다 그 근처를 지날 일이 있었는데 꽤 큰 편의점이 되어있더군요. 그 착하지만 열심히 살던 부부가 차린 것일까요? 꼭 그랬으면 합니다.


5. 이 일을 최근 연말 모임에서 농담 삼아서 이야기를 했더니, 해외에서 고문형 창업이 유행하는 걸 알아차린 게 저 혼자만이 아니더군요.


제가 최근 블로그에 늘 쓰는 게 AI, 4차 혁명에 관한 글인데 꼭 그 글에 덧붙여지는 게, AI가 대체할 수 없는 혹은 대체 시 비용 대비 효율이 나빠 자본가가 선택하지 않는 분야가 인간이 먹고살 길이라는 내용입니다. 이 생각은 지금까지는 변하지 않고 있어요.


제가 위에 적은 첫 <고문> 일대기는 (사실 지금 서술하면서 말이 좀 유려해지긴 했습니다만) 나름 자신의 경험과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해결법을 제시한 사례이며, 이런 방식의 해결법은 비단 <만화대여점> 경영뿐이 아니라 좀 더 큰 분야, 혹은 새로 시작하는 분야에서 문제점을 해결하는데도 유효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생업을 놓으시라는 것은 아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일까.
내가 좋아하는 일에 어떠한 문제가 발생 시 나는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까?
그것이 나의 수익 혹은 경력발전에 도움이 될까?


에 대해 고민해보시는 것은 어떠실지요? 혹시 아나요? 정말 번뜩이는 부업이 떠오를지?

출처: http://narsass.tistory.com/414 [나르사스의 세상 경영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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