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어디에서

기적에게도 시간은 필요하다

Bled, Slovenia

by hearida

당시, 나는 이별을 결심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했음에도 꽤 오래 놓지 못했던 누군가와 어쩌면 더 쉽게 헤어지기 위해 그 먼 곳까지 떠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블레드에 도착한 것은 여행의 중반에 이르러서였다.

성벽 끝에 서자 호수 한가운데 서 있는 작은 섬 하나가 보였다.
오랜 시간 사공들이 돌을 날라 만든 인공섬.

누군가 말했다.
그 섬에 성당이 하나 있는데 그곳의 종을 울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그런 이야기.

섬에 가기 위해 배를 기다렸다.
날은 아직 추웠고 배를 출발시킬 수 있을 만큼 사람이 모일 때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평소 같으면 포기했을 법도 한데 무엇이 그리 절박했는지 그 추운 바람을 맞고 맞으면서도 기다렸다.

꼭, 그 종을 쳐야만 했다.

겨우 배가 출발했다.
사공의 노가 한참을 저어지고서야 저 멀리 섬과 성당, 그리고 종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배가 닿자 가파른 계단을 올라 성당 안에 들어섰다.

종을 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두꺼워 쉬이 쥐어지지 않는 줄을 겨우 붙잡고 흔들어봐도 무거운 종은 호락호락 제 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다.

눈물이 났다.
그깟 사랑이 뭐라서 나만 이렇게 어렵고 힘든 거냐고.

가뜩이나 힘든데 너까지 왜 나를 힘들게 하냐고.
그렇게 따지듯 줄을 흔들고 흔들었다.
그러고서야 겨우 종소리가 울렸다.

그러고도 한동안 차마 종을 떠나지 못하고 그 곁을 맴돌았던 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나 내 마음이.

물론 종을 치고 나니 짠 하고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그런 기적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적어도 나에게는 전혀.
이후에도 여전히 새로운 만남과 가슴 아픈 이별, 그리하여 얻어지는 아릿한 상처가 반복되었다
동화 같은 전설은 그렇게 잊혔다.

그리고 제법 시간이 흘렀다.
세월을 타고 종소리가 흐르고 흘러 이제야 내 귓가에 닿았다.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가 내 곁에 있으니.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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