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날의 바다

- 타니아 슐리, '글쓰는 여자의 공간' 중에서

by hearida

"나는 나 자신이어야 하며, 내 안에 무언가 있어야 한다. 나는 진정한 내 것을 소유하고 싶다. 그리고 나 자신을 보여줄 무언가를 창조하고 싶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카렌 블릭센 Kren Blixen 1885.4.17 - 1962.9.7) - 타니아 슐리, '글쓰는 여자의 공간' 중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회사를 관두고 프리랜서의 삶을 택한 것은 서른 즈음이었어요. 그런데 늘 꿈꾸던 일이 막상 현실이 되니, 생각처럼 그렇게 고상하지만은 않더라고요.

일을 안 할 땐 돈이 없어서 안달이 나고, 일을 할 땐 일 때문에 쉴 수가 없었어요. 한창 바쁜 시즌에는 일이 너무 몰려서 이러다 병나지 싶을 만큼 밤샘을 계속하다가, 또 일이 없을 땐 앞으로 어떻게 사나 걱정될 만큼 너무 한가한 거예요. 그러니 몸도 마음도 오르락내리락, 마치 비행 중에 태풍을 만난 것처럼 위태로운 날들이 이어졌지요.
나이는 어느새 서른 고개를 넘었는데 남자친구도 없고 불안한 저에 비해, 주변 친구들은 다들 자리 잡아 결혼도 하고 잘 사는 것 같더라고요. 저만 뒤처지는 것 같아 더럭 겁이 났어요. 더 이상 아무 기회도 얻지 못하고 모든 게 다 끝나버리지는 않을까, 그런 막막함이 늘 제 주위의 공기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를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이때가 일 년 중 가장 바쁠 때라, 몇 주는 낮도 밤도 없이 일만 하며 지내고 있었어요.

밖에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고 다들 들떠서 메리 크리스마스니 해피 뉴이어니 외치고 다니는데, 저는 혼자 방에서 트레이닝 복에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컴퓨터 자판만 두드리고 있자니 서글퍼지는 거예요. '나는 돈을 번다', '돈이 들어온다', 평소라면 이 주문으로 잦아들 마음의 요동이었는데, 이때만큼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더군요.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드디어 마지막 작업까지 납품을 한 게 딱 새벽 4시였어요. 잠도 안 오고 이상하게 정신이 또렷하대요. 그저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어요. 그래서 바로 씻은 후에 든든히 옷을 챙겨 입고 무작정 밖으로 나갔어요. 그리고 향한 곳이 동서울 터미널이었죠.

가장 먼저 출발하는 버스를 타야지 맘먹고 갔는데, 표를 사려니 눈에 강릉이 들어오더라고요. 강릉은 그때까지 한 번도 가 본 적 없었거든요. 딱히 뭘 해야겠다, 봐야겠다 그런 생각도 없이 무조건 강릉행 버스에 올라탔어요.

그제야 피로가 쏟아져서 차에 타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어요. 며칠 만에 맛보는 단잠이었죠. 두어 시간쯤 지나 눈을 뜨니 창 밖에 눈이 가득 쌓인 거리가 보였어요. 아, 드디어 서울을 벗어났구나 실감이 났어요.

강릉에 가서 뭘 할지 생각하다 핸드폰으로 검색을 했더니 카페 거리가 나오더군요. 사실 그때는 커피거리가 막 시작되던 시기라 그렇게 유명하지 않았어요(저... 옛날 사람...;;). 더 생각 안 하고 그냥 거기로 가자, 정했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택시에 올라타 아저씨께 안목해변으로 가달라고 했어요. 겨울이기도 하고 이른 새벽부터 움직여서 그런지, 시간도 아직 일러서 해변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처음으로 혼자 겨울바다를 보러 왔는데 기분이 이상하게 좋더라고요. 깊은 푸른빛을 띠고 넘실거리는 파도, 푸른 하늘과 드넓은 겨울 바다를 보니까 마음이 확 트이는 거예요. 기쁜 마음에 추위도 잊고 혼자 한참이나 해변을 걸었습니다.

해변 끝에 다다르니 해초 더미를 치우시는 아저씨께서 계시더라고요. 이왕 온 거 기념 삼아 사진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첫 혼자 여행, 첫겨울 바다, 첫 강릉.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어서요. 그래서 아저씨게 사진 좀 찍어주십사 부탁드렸어요. ‘이거 어떻게 찍는지 잘 모르겠다’며 대충 버튼을 누르셨는데, 나중에 확인하니 너무 멋진 사진이 찍혀있었어요. 제 얼굴이 안 나온 것만 빼면요.
그 후로도 한참을 걷다가 카페에 들어가 따뜻한 커피를 시켰어요. 그런데 커피도 이상하리만치 너무 맛있더라고요. 이 바다가 제 우울함과 모든 나쁜 생각을 다 가져가고 저에게 좋은 기운을 준 것 같았어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바다가 저에게 전해주려는 것처럼요.


여전히 힘들고 지칠 때마다 그 여행을 생각해요. 그날의 바람과 파도와, 마음을 치던 자유로움과 후련함 같은 것들.

그리고 그런 바다와 같은 순간을 마음속에 많이 만들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고단한 날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도록, 다시 기운을 낼 수 있도록.


어느새 봄이 한 발 가까이 다가와 따스한 볕을 내려주는 날이네요.

오늘도 담뿍 행복하세요. :)


Gangneung, Korea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