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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dache Feb 14. 2021

버릴 수 있는 용기

전공책을 버렸다

짙은 밤갈색 식탁을 버렸다. 신혼살림으로 마련한 그 식탁은 나와 함께 네 번의 이사를 견디느라 식탁 다리에 흠집이 생겼고, 18년 동안 나의 행주질을 받아내느라 광택이 벗겨졌다. 그 식탁을 샀던 날을 기억한다. 이월이었고 진눈깨비가 날렸다. 결혼을 한 달 남기고 남자 친구였던 남편과 가구전시장이 즐비한 서울 근교로 지하철을 타고 갔다. 스산한 날씨만큼이나 마음이 복잡했다. 결혼을 하겠다는 나에게 나의 부모는 맹렬히 화를 내고 있었고, 결혼 준비는 뒤죽박죽이었다. 나 역시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에게 몹시 화가 났다. 원망과 분노로 부글거리는 마음으로부터 찬바람이 몰아쳐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울고 싶은 내 뺨을 때리기라도 하듯 나는 가진 돈이 얼마 없었고, 내 맘에 드는 가구는 너무 비쌌다. 그리고 날은 추웠다. 점심을 먹으러 중국집에 들어가 짜장면을 시켰다.

"눈이 오네"

"...... 그렇네"

내 부모의 박대와 나의 눈물을 오롯이 홀로 견디는 그에게 나는 사과도 위로도,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말없이 짜장면을 먹고 축축한 눈을 맞으며 여기저기 한 참을 돌아다닌 끝에 마침내 침대며 소파, 식탁을 계약하고 돌아왔다. 기쁘지 않았다. 큰돈을 주고 이제껏 한 번 도 가진 적 없는 침대며 화장대, 큰 소파를 샀는데 신나지 않았다. 그러나 진눈깨비 내리던 날 내 마음에 휘몰아치던 찬바람으로 말미암아 뜨악했던 그 가구들을 막상 17평 오래된 연립주택, 우리의 신혼집에 채워 넣고 보니 그와의 결혼이 실감 났다. 우리는 소꿉장난하듯 남편과 아내가 되었다. 나는 그가 퇴근하기를 기다려 튼튼한 밤갈색 식탁에 된장찌개를 끓이고 생선을 구워 저녁을 차렸다. 그는 성실한 남편이었고 나는 보호받고 있다고 느꼈다.


결혼식이 끝나고 한 달쯤 지난 뒤 대학원 선배가 놀러 왔다. 서울에서 버스로 네 시간이나 걸리는 이곳으로 나를 보러 오겠다고 아침에 갑자기 전화를 걸어온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나 걱정이 되었다. 그녀도 그녀의 남편도 모두 잔잔한 호수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속 깊고 신중한 사람들이라 나는 학교에서 그들을 따로따로 알고 지내다 그 둘이 부부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깜짝 놀랐다. 선한 눈매와 천진난만한 웃음이 서로를 닮은 것이 그제야 눈에 보였다. 내가 결혼과 동시에 서울을 떠나 남편의 직장이 있는 곳에 정착해 학교와, 나의 공부와 멀어지는 것을 걱정했던 그녀였다.  나는 지쳐있었다. 선배들은 먼 곳의 대학에 기차를 타고 가서 세 시간짜리 강의를 하고 돌아왔다. 그나마 그런 자리도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나는 다른 나라의 대학에 지원하고 싶었지만 당장 다음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그러나 애쓰고 싶지가 않았다. 멈추고 싶었다. 쉬고 싶었다. 뚜렷한 인생의 성과도 없이 갑자기 결혼을 하겠다는 나에게 불같이 화를 냈던 내 부모도 그녀와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내 신혼집 작은 거실의 큰 소파에 앉아 그녀는 2년 차에 접어든 자신의 결혼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너무 아무렇지 않게 결혼했어. 우리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모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양가 상견례하고 결혼 날짜 잡고. 너무 아무 일 없이, 너무 자연스럽게, 단 한 번의 브레이크도 없이. 결혼 과정이 그래서 그런지 애달프고 뭐 그런 애틋한 게 없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랑받는 여자의 행복함이 그녀의 얼굴에서 빛나고 있었다. 파란만장한 결혼으로 마음고생한 나를 위로하기 위한 말이었다. 이렇게 멀리까지 와 나를 위로해주는 그녀가 고마웠다. 그녀를 고속버스 터미널에 바래다주고 그녀를 태운 버스가 나를 떠나가는 것을 지켜봤다. 내가 서울에서 멀어졌다는 것이, 매달리던 공부를 멈추었다는 것이, 더 이상 애쓰지 않는 것이 실감 났다.


그리고 출산과 육아의 날들이 쓰나미처럼 다가왔다. 이번에는 스스로의 결정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멈추어야만 했다. 다시 공부를 시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책꽂이에 먼지를 쓰고 있는 전공책들을 버릴 수 없었다. 다시 보지도 않을 그 책들을 버리지도 못하고 네 번의 이사를 했다. 이제 내년이면 첫 아이가 대학에 갈 나이다. 나는 참으로 오랫동안 내 인생의 실패를 인정하지 못하고 절절 매고 있었다. 부끄러웠다. 마무리하지 못한 내 꿈의 흔적을 정리하기가 두려웠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책들을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이미 마흔의 중반을 넘어서고 있다. 선택과 집중으로 인생을 단정히 해야 할 나이와 어느새 마주하고 있었다.


정리하기로 마음먹고 나니 아까운 책이 많았다. 인터넷도 없던 90년대 어렵게 구한 책도 많았고, 비싸게 산 책도 많았다. 중고서점에 팔려고 ISBN을 입력했더니 너무 오래되어서 팔 수 없는 책이라고 하고, 동네 도서관에 기증하려고 하니 출판된 지 2년이 넘은 책은 받지 않는다고 한다.


정리가 너무 늦었다. 정리에도 적당한 때가 있다는 것을 새삼 이 나이에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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