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 in 시드니

뭐라고? 한 달 살기를 이렇게 갑자기?

by 목화mocha

12월 31일

카운트 다운으로 사람들이 술렁일 그 시간,

나는 어떻게든 나의 소멸을 막겠다는 의미로 브리즈번행 편도 항공권을 예매해 버렸다.

그리고는 남편에게 통보를 했다.


" 나와 아이만 가는 게 불안하면 함께해도 좋아.

하지만 난 한 달 동안 있을 거야.

같이 있을 수 있는 만큼 있어줘,

나머지는 내게 맡겨줬음 해"


시작은 늘 이렇게 갑작스럽다.

어쩌면 급살 맞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결혼을 하고 생긴 왼쪽발의 족쇄,

아이를 낳고 생긴 오른쪽발의 족쇄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내 족쇄는 무지갯빛, 찬란하고 아름다우니까,

다만 내딛는 걸음이 무거워졌을 뿐.


남편은 기러기 가족을 끔찍이도 싫어한다.

과거에 시아버님이 일 때문에 혼자 계시던 시간 힘들어하던 모습이 트라우마처럼 남은 것 같다.

그런 반면 나에게는 누구보다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함께하는 사람이 누구든 천성적으로

'함께'에 집착하여 모든 걸 맞춰주는 나이기에,

혼자서 충전하는 시간은 생명유지의 필수장치이다.


결혼과 육아 이후 충전기회는 없다시피 했고,

내 배터리 수명은 점점 닳아가고 있었다.


그 결과는,

매일 복용해야 하는 하얀 약 한 알, 캡슐약 한 알.

손바닥 위에 약을 올려놓을 때마다

"넌 끝이야, 예전의 너는 이제 없는 거야."

라고 약들이 외치는 것 같았다.


그러던 와중 지난 여행들에서 차곡차곡 쌓인 마일리지들이 소멸된다는 알림톡 하나.

여행덕후인 내게 마일리지의 소멸은 곧 나의 소멸과도 같게 느껴졌다.


난 살아야만 했다.


단순히 해외 한 달 살기 트렌드에 편승한 게 아니었다.

나는 어떤 곳이든 낯선 곳으로 떠나 낯선 사람들 속에서 다시 나를 찾아내야만 했다.


어디로, 얼마나, 어떻게 갈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채

나의 여행이 시작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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