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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형균 May 12. 2023

투수에겐 스피드보다 제구력

사람에겐 스피드보다 자제력

신문을 보다가 이번 WBC(World Baseball Classic;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우리나라 투수들의 부진이 언급된 칼럼을 보았다. 스피드는 좋은데 제구력이 뒷받침되지 않아 호주와 일본에 대량 실점하며 무너졌다는 내용이었다.
아전인수격으로 난 어제 내 행동을 떠올리며 반성했다. 주문했던 침대, 수납선반 하나씩과 아파트의 팬트리룸을 가득 채울 수많은 반투명 플라스틱 서랍식 수납케이스들이 어제 오후에 도착했다. 한정된 공간에서 수납공간을 늘리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대한민국이 왜 아파트 공화국이 되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아파트는 좁은 땅에 많은 인구가 밀집해서 살기 위한 적응 방법이었다. 마찬가지로 난 기존의 팬트리룸과 수납장 안에 사이즈에 맞는 수납케이스들을 적층해 넣어 '아파트화'했다. 박스 같은 큰 물건이 들어갈 공간을 위해 일부는 그대로 놔두고. 배송기사가 수납케이스 박스들을 다 개봉하는 데만도 시간이 꽤 소요됐다. 여태 이렇게 많은 수납케이스들을 배송해 보긴 처음이라고 했다. 팬트리룸과 수납장에서 기존의 물건들을 꺼내고 거실과 드레스룸, 복도를 가득 채운 수납케이스들을 사이즈에 맞춰 꽂기 시작했다. 선반을 물걸레로 닦은 후에 사다리에 올라가서. 오후부터 시작된 작업은 아버지께서 퇴근하시고 저녁을 차려드린 후 다시 재개되었다. 널브러진 물건들과 수납케이스들에 행여나 아버지께서 지나시다 다치실까 염려가 되었다. 밤 10시 반, 꼬박 8시간을 쉬지 않고 일하고 나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면서 잠이 쏟아졌다. 순간 잠시 갈등이 되었다. 최근 내가 포스팅에 올린 것처럼 때를 놓치지 않으려면 만사 그만두고 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려고 한 순간 내일 아침에 아버지께서 드실 음식을 챙겨놓지도 않고 설거지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고 나니 11시 반이 넘었고 순간 메스꺼운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잘 느끼지 않던 증상이었다. 한마디로 무리한 것이다. 그새 밀려오던 잠은 한풀 꺾였고 여기서 또 하나의 악수를 두었다. 내친김에 수납케이스들을 마저 넣기로 한 것이다. 결국 새벽 1시가 되어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피곤이 덜 풀린 채 잠에서 깨어 '투수에겐 스피드보다 제구력이 중요하다'는 신문 칼럼을 보며 후회하고 반성하고 있다.
미리 다른 일을 챙겨놓고 10시 반에 잠 올 때 잤다면 지금쯤 "그렇지. 투수한테 제구력이 중요하듯, 사람한텐 자제력이 중요하지."라며 스스로 자제력 있음을 뿌듯해하고 있을 텐데.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하며, 실패해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스스로를 위안해 본다.
어제 수납케이스들을 다 꽂고 나니 제일 큰 사이즈 10개가 누락된 걸 알게 되었다. 영수증을 확인해 보니 누락되어 있었다. 매장에서 주문할 때 A4 용지 앞 뒤 가득 적힌 구매리스트를 직원에게 주었고, 그걸 전산에 입력하는 과정에서 직원이 빠트린 것이다. 마지막에 영수증을 꼼꼼히 확인하지 않은 내 잘못도 있다. 아니 내 탓이다. 아버지 병원 연구실로 가는 가구들과 같이 신청해서 품목이 많았다. 세일 기간은 며칠 전 끝나서 아마 지금은 추가구매해도 할인적용은 어려울 듯하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직원도 나도 인간이다.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타인의 실수로 인한 피해에 화가 나지 않고 웃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건 궁극적으로 그의 잘못이 아니라 확인하지 않은 내 잘못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도 한다. '이 공간은 서랍식 수납케이스들을 꽂기보다는 그냥 놔둬서 서랍식 수납케이스에 들어가지 않는 큰 물건들을 수납하라고 하는가 보다. 내게 그런 물건들이 많아서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누락했나 보다.' 수납할 물건들을 보니 실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자 그 직원에게 감사한 마음이 일어났다.

나 자신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솔직히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 자야 할 시간에 자지 않고 혹사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실컷 일한 나 자신은 얼마나 서운할까? 무려 10시간 동안 잠시도 쉬지도 못하고 일했는데 좋은 소리도 못 듣고 꾸지람만 들으니. 잘못한 건 휴식시간도 안 주고 제 때 먹이지도 않고 잠도 제 때 안 재우고 야근시킨 악덕 사업주인데. 누가 누굴 뭐라 하는지. 페이스북 포스팅에 '때를 놓치지 말자. 특히 밥 먹고 잠잘 때.', '바쁠수록 쉬고 명상해 가면서 일하자.'라고 말하면서 정작 못 지키고 있으니. 오늘부터 새로운 가사도우미가 오는데, 어제 혼자 일하면서 내일 그 사람을 활용할 생각은 해놓고, 왜 오기 전에 스스로의 힘으로 다 정리를 하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세상에서 가장 이해가 안 되는 존재이지만, 다른 사람이 이해 못 해도 나만은 이해해줘야 할 상대이니 이해할 수밖에 없다. '내가 이해하는 건 사랑하기 때문에 이해한다.' 자신에게 못할 짓 해놓고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로 때우려는 나 자신이 가증스럽지만 어쩌겠나? 평생 헤어질 수도 없고 같이 가야 할 영원한 동반자인데. 속 넓은 내가 이해하고 용서해야지. 속 썩이는 자식이 효도할 날이 있듯, 나도 언젠간 나 자신을 뿌듯하게 만들지 모르지. 그날이 오긴 할까? 왔으면 좋겠다. 고생한 나 자신에게 미안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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