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결핍이 맞물린 자리

누구도 낭비하지 않은 시간, 각자의 조각으로 완성한 하나의 계절

by 해루아 healua

1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한자리를 지켜온 남편의 뒷모습에는 늘 고요한 정적이 흐른다.


우리의 신혼 1년 차, 퇴근한 남편이 내게 처음으로 공개한 것은 5년 치 기록이 빼곡한 엑셀 가계부였다. 처음엔 당혹스러웠고, 이내 경이로웠다. 흔히들 결혼하면 남자는 180도 변한다고들 하지만, 내 남편은 예외였다. 변했다면 고작 3도쯤이었을까. 그는 놀라울 정도로 한결같았고,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치열하게 살았다.


퇴근 후 주식 강의를 듣고, 주식 일기를 쓰고, 헬스장에 다녀와 다시 책을 펴는 사람. 그의 루틴은 기복 없는 그래프처럼 견고하다. 한때는 그 성실함이 존경스러웠으나, 때로는 그 뒷모습이 너무 건조해 보여 마음이 쓰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내게 툭 던지듯 말했다.

"나를 위해 해준 게 참 없네. 여행이라도 자주 다녀볼걸."

그 짧은 한마디에는 악착같이 모아 온 통장 잔고만큼이나 묵직한 갈증이 배어 있었다.


나는 그와 정반대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다.


20대엔 아르바이트비를 털어 동유럽을 헤맸고, 30대엔 퇴사 후 서유럽의 공기를 마셨다. 누군가는 그 돈이 아깝지 않냐 묻지만, 나는 남편이 '통장의 숫자'를 쌓을 때 내 '마음의 풍경'을 쌓았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서로의 과거를 보며 후회 대신 고마움을 전한다.

"내가 못 해본 삶을 당신이 대신 살아줘서 고맙다"라고. '그의 성실함'은 우리 가족의 단단한 울타리가 되었고, '나의 경험'은 우리 대화의 색채를 풍성하게 물들였다.


결국 우리 중 누구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각자의 방식대로 삶에 진심을 다했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서로 다른 자산을 합쳐 오늘을 함께 쌓아간다. 과거의 선택을 아쉬워하기엔, 그 선택들이 빚어낸 지금의 우리가 너무나 소중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