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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에 안기다

작지만 충만했던 순간들

by 해루아 healua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창밖 너머로 동해의 아침이 조용히 물결치고 있었다.


매일 뜨는 태양인데, 동해의 해는 매번 새롭다. 가슴이 태양처럼 뜨거워졌다. 커튼 사이로 스며든 은은한 햇살은, 말없이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난 그 평온함에 기대어 다시 눈을 감았다.


두 번째 알람이 울렸다. 새벽 6시 40분.


"일어나자."


남편은 귀신같이 벌떡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다.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몇 번 깜짝이며 간신히 눈을 떴다.


드디어, 나의 작은 버킷리스트를 이룰 시간.


우리는 서둘러 모자를 눌러쓰고, 고양이 세수만 하고 숙소 밖으로 나섰다. 대단한 일정은 없었지만, 오늘은 왠지 조금 더 특별한 하루가 될 것만 같았다.


공기는 차가웠지만, 그게 뭐 대수랴. 그냥 달리면 되는 거였다. 우린 운동화를 질끈 묶고, 천천히 발을 뗐다.






이사부길


삼척해변을 따라 달리는 풍경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일렁이는 파도처럼 내 마음도 잔잔하게 흔들렸다.

이사부길을 따라 달리다 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해안길을 따라 함께 뛰고 있었다.


낚시하는 아저씨, 캠핑의자에 앉아 여유를 즐기는 할아버지, 친구와 함께 달리는 사람들, 그리고 나처럼 혼자서 묵묵히 리듬을 이어가는 이들까지. 모두가 바다를 품은 채 달리고 있었다.


난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찼다.

채운다는 건, 꼭 손에 쥐어야만 가능한 게 아니니까.


우리는 이상하리만치 숨도 차지 않고, 다리도 무겁지 않았다. 분명 얼마 전 까지도 피곤했는데, 어느새 피곤함이 씻겨 내려간듯했다.


이게 바다의 힘일까.


같이 뛰는 남편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5km를 넘기며 우리는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숙소로 돌아와, 내가 좋아하는 사우나에 몸을 뜨끈하게 담갔다. 열탕에 몸을 오래 담그고 있으니, 마치 하루를 천천히 데우는 기분이었다. 나른했다. 몸속 깊은 피로며 지친 마음의 덩어리들이 수증기처럼 조용히 빠져나갔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동해를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정말… 행복하다.”

행복은 거창하지 않았다.







현지 맛집


우리는 현지인 추천 음식 오징어볶음을 먹고, 잠깐 따뜻한 햇살을 쬐며 차 안에서 낮잠도 잤다.


죽서루 근처에선 한 고양이와 눈인사를 나누었고, 관동팔경의 하나인 죽서루에 앉아 천천히 풍경을 감상

했다.



죽서루



집으로 곧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우리는 예약도 없이 레일바이크 매표소로 향했다. 다행히 용화역에 2자리가 남아 있었다. 운이 좋았다.


페달을 밟으며 달린 삼척의 바다 풍경은 또 하나의 선명한 기억으로 남았다. 알록달록한 터널을 지나, 마주 오는 사람들과 손인사도 나눴다.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우리는 다시 아이처럼 웃었다. 그 웃음은 앞으로의 길을 조금 더 가볍고 환하게 밝혀줄 것 같았다.





여정의 마지막은 황영조 기념공원.

삼척이 황영조 선수의 고향이라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다.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그 역시 이 바다를 보며 달렸을까?

꾸준히 달리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 그의 기운이 닿을지도 모른다.


나는 조용히 시상대 모형 위에 올라 그와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언젠가 나도 마라톤에서 멋진 기록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괜히 마음속으로 엉뚱하고 귀여운 상상을 해본다.


돌아오는 길, 창문을 열자 바다의 향기가 조용히 스며들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처럼, 마음도 함께 풀어졌다. 우리는 바람을 온몸으로 들이켰고, 말없이 같은 감정을 나누고 있었다.


이따금 생각한다.


그날의 회 한 점, 그날의 파도 소리, 그날의 바람결까지. 그 모든 순간이 내 마음 깊숙이, 조용히 스며들었다.


작지만 충만했던, 삼척의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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