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사항은 채식이지만, 해치지 않아요
어른이 되면 자기소개는 하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았다. 웬걸. 어른이라서 더욱 조직적이고, 폭압적이고, 치졸하고, 때론 생존이 걸려있는 자기소개를 분위기에 맞춰서 “잘”해야 한다. 소속되고 싶다면, 네 정체를 밝혀라.
직장을 옮긴 지 3개월이 되었다. 새 직장에 출근하기 전날 “잘 알기 자료” 양식을 받았다. 이력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름, 전화번호, 주소, 가족관계, 학력, 경력, 종교, 취미, 그리고 특이사항.
한국 사회가 얼마나 집단주의적이고 차별적인지 알아보려면, 첫째, 당신이 여성으로 태어나서, 둘째, 기간제 근로자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결혼 적령기인데 연애를 하지 않거나, 고기를 먹지 않으면? 당신은 방금 용에 눈동자를 그려 넣었다. 화룡점정으로다가.
이름, 전화번호, 주소까지는 괜찮았다. 가족관계와 학력과 경력은 뭐 가뿐하지. 가뿐하긴 한데, 아버지의 직업과, 어머니의 직업과, 남동생의 직업까지? 의구심은 넣어두었다.
종교에서부터는 한숨이 나왔다. 절대자를 믿고, 기도도 하지만, 매주 교회에 출석하지는 않는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단어로 '무교'가 적절할지, '기독교'가 적절할지 잠시 고민했다.
활자를 깨친 순간부터 변치 않았던 취미는 독서인데, 여행지에서 숨을 고르듯 풍경이 되어 책을 읽을 때, 볕이 좋은 날 연주곡을 들으며 책을 읽을 때, 그림을 보고, 공연을 관람하고, 사람을 만나며 문학적 수사를 비로소 마음으로 느낄 때, 행복이 목 끝까지 차올라서 가끔 목이 멘다는 말이 “독서, 여행, 음악 감상, 공연 관람”은 아닌 것 같았다. 기입하고 보니 더욱 멀고 동떨어져 보였다.
다음 항목이 지뢰였다. 위험한 어떤 것을 보니, 신동집 시인의 오렌지라는 시가 떠올랐다.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에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누구인지 잘은 몰라도.
특이사항 우측의 공란은 넓었다. 정작 넓어야 할 칸은 좁고 낮아서, 비루한 단어에 나를 욱여넣어야 했는데, 스테레오타입 속으로 안전하게 숨은 내 앞에 이런 위험하고 커다란 공백이 도사리고 있다니. 마음만 낸다면 내가 껍질을 벗기고, 속살을 깔 수 있는 마땅히 그런 오렌지만이 문제가 되는데. 마음을 내어 질문을 들여다보고 속내를 내보일만한 마땅히 그런 항목만이 문제가 되어야 할 텐데. 커서가 깜박이며 답을 재촉한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굳이 공식적으로 밝히지 말고, 조용히 편식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적어서 제출했다. 특이사항: 채식. 아니나 다를까. 문제가 되었다.
언제부터 채식주의자가 되셨어요. 왜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럼 뭘 드세요. 한강의 채식주의자 봤는데 되게 무섭던데요.
담담하게 통과의례를 치르고, 별스러운 배려를 받게 되었다. 고기만 먹지 않는 것인데도 그렇다.
채식에는 단계가 있다. 고기나 생선은 물론이고, 달걀이나 우유, 치즈, 버터 같은 일체의 유제품, 심하게는 벌이 채취한 꿀까지 피하는 경우도 있는 비건. 달걀을 먹는 오보, 유제품을 먹는 락토, 달걀과 유제품을 모두 먹는 락토오보, 해산물까지 먹는 페스코. 더 유연한 방식인 폴로, 플렉시테리언.
나의 경우 익히지 않은 생채소, 과일, 견과류 위주의 식사를 하는 로비건을 지향하고, 실제로 여건이 허락하면 최대한 그렇게 하는 편이지만, 직장이나, 외부에서나, 여행을 할 때는 해산물까지도 먹고, 고기가 들어있는 경우 고기만 빼고 먹을 수 있는 걸 골라 먹는다거나, 육수를 내어 끓인 찌개의 국물까지도 먹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배려를 받는다. 자연스럽게 동화되는 것이 처음부터 불가능했던 것처럼 포화점에 도달하는 순간 나는 언제고 가장 먼저 녹지 않는 결정(結晶)이 된다.
다른 생명체의 살을 취하지 않는 것이 이토록 어렵다. 그러나 과분하도록 따스한 순간이 있었다.
구내식당 메인 메뉴가 스테이크였던 날 곁들임으로 나온 샐러드를 비롯 먹을 수 있는 음식만 골라서 받아왔다. 고기를 못 먹어서요. 스테이크는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 가장 바쁜 시간이었고, 대기줄이 늘어서 있었다. 식당이 상당히 넓은 편인데도 사람으로 가득했다. 반쯤 식사를 마쳤을 때 조리사 한 분이 접시를 들고 테이블로 다가오셨다. 이건 드실 수 있으세요? 갓 튀긴 새우와 해시브라운이었다. 단 한 사람을 위해 그 바쁜 와중에 새우 세 마리를 손질해서 튀기고, 감자를 채 썰어서 바삭하게 구운 것이다. 수고와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마음을 써주신 게 확연하게 느껴졌다. 너무나 감사해서 되려 얼떨떨한 채로 인사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을 눈여겨봐두었다가 정확히 찾아낸 것까지도 놀라웠다.
따뜻하고 맛있었다.
최대한 폐를 끼치지 않고, 주변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면서, 채식을 고수하려는 것은 이런 다정한 순간들 때문이다. 주변을 날카롭게 찌르는 신념이 아니라, 둥글둥글한 선의로 무장해서 유연하게 나아가고 싶다. 용해되지 않은 앙금이 퇴적될 때 새우튀김과 해시브라운을 떠올린다. 그만 녹아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