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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mi Aug 15. 2018

채식을 하게 된 계기

채식을 하면 살이 빠지나요? 아니요. 저는 오히려 살이 쪘는데요!

일주일 걸러 하루를 체하며 어렵게 여름을 건너고 있다. 이렇게까지 자주 체하면 먹는 일에 저절로 열의가 식는 법이다. 음식을 골라먹고, 최대한 꼭꼭 씹어 먹고, 적게 먹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불편하면 체한다. 원하는 시간에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편안한 사람과 좋아하는 걸 먹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채식을 하는데도 이 정도이니 어릴 때는 더했다. 편식이 심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먹는 행위 자체를 싫어했다. 그래서인지 어릴 적 사진을 보면 늘 안색이 나쁘다. 고기를 먹으면 특히나 속이 불편하고 머리가 어지러워서 육식은 자연스레 피하게 되었다. 한의원에서는 나를 보고 타고나길 소화 기능이 약하다고 했다. 보통 사람보다 위가 훨씬 작다고 했다. 고기가 잘 소화되지 않으면 버섯이나 두부나 해산물을 고루 먹으면서 영양소를 보충하라고 했다. 적게 먹어야 탈이 안나는 체질이니 억지로 식사를 강요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였을까. 음식을 남기지 말자를 가훈처럼 배우고 자라는 다른 집 아이들과 달리 우리 집 식탁에서는 "먹다가 체할 것 같으면 무조건 남겨라. 아파서 병원 가면 병원비가 더 든다." 요지의 말이 좀 더 친절하게 오고 갔다.


먹는 데 자율이 생기니 좋아하는 음식이 늘었다. 전에는 식사 자체가 고행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먹는 행위가 주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바나나. 프라이팬에 살짝 구워서, 메이플 시럽을 뿌리고, 그 위에 으깬 견과류를 올려 먹으면, 사람이 일요일 아침처럼 느긋해진다. 이를테면 아보카도. 반을 갈라서 씨를 빼내고 씨가 빠진 오목한 자리에 간장 몇 방울을 떨어뜨린 뒤 수저로 떠먹으면, 사람이 화요일 오후처럼 씩씩해진다. 이를테면 병아리콩. 오래 불려서 푹 삶은 따뜻하고 포슬한 콩을 아빠 수저 가득 떠서 후후 불어 먹으면, 금요일 겨울밤처럼 포근해진다. 이를테면 땅콩버터. 사과를 8등분해서 땅콩버터를 찍어 먹으면, 전쟁도 포화도 없는 어느 목요일 아침처럼 아늑해진다. 이를테면 케일. 레몬과 키위를 넣고 스무디로 갈아 마시면, 토요일 가을 아침처럼 상큼해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과도기 단계를 거쳐 온전히 채식으로 정착한 20대 초중반 무렵 체중이 정상화됐다. 이전까지 미달이었던 체중이 표준에 가까워진 것이다. 채식을 한 뒤 오히려 체중이 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뿐이랴. 스트레스를 받으면 하루 사이에도 3~4kg씩 널뛰던 체중이 일정하게 유지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긍정적인 변화였다.


"어쩌다 채식을 하게 되셨어요?"라는 물음에 "동물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건 아니고요. 순전히 건강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곤 한다. 특별한 계기로 인해 채식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채식으로 귀결된 경우이기 때문이다.


물론 채식을 계기로 관심 분야가 넓어지긴 했다. 푸드 마일리지와 환경 영향을 고려해 식재료를 고르게 되고, 공정무역 제품을 선택하게 된다. 식용가축의 사육 환경을 떠올리게 되고, 동물 실험에 반대하게 된다. 관련 자료와 다큐멘터리를 찾아보게 되고, 단체에 후원을 하게 된다. 되도록 지구에 해를 끼치고 싶지 않아 지나치게 소유하는 삶을 지양하게 된다. 그러나 의지가 박약이라, 일회용품을 쓰지 말자고 수십 번씩 결심하다가도, 잠깐의 편의 때문에 금세 테이크아웃 컵 생활로 돌아오고 만다. 깜박하고 장바구니 챙기는 걸 잊기도 한다. 다만 나에게만 이로운 생활이 아니라 내가 빚지고 사는 이 행성에 이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기본만큼은 잊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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