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펜하이머>, 최고의 과학자는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졌는가
이처럼 충분한 근거 없이 모호하고 사소한 단서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함부로 단정하는 사고의 오류를 '독심술'이라고 한다... 그러니 남의 마음을 읽으려 하지 마라. 그저 상대방이 하는 말에만 집중하라.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그가 하는 말의 의미와 감정을 이해하려고 애쓰라는 말이다.
<심리학이 서른 살에게 답하다> 169
영화 오펜하이머는 개봉 전 핵실험 장면을 CG(컴퓨터그래픽)를 사용하지 않고 촬영했다는 사실이 화제가 되며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또 다른 역대급 블록버스터 영화로 주목받았다. 화려한 영상을 기대했는데, 막상 영화는 오펜하이머란 인물의 굴곡진 인생사를 따라가며 그의 심리적 고뇌를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핵무기 개발을 이끈 맨해튼 프로젝트의 성공이 오펜하이머 인생의 '정점'이라면, 이후 공산주의자로 몰리며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야 했던 1950년대 이후의 삶은 '나락'에 비견될 수 있다. 특히 영화에서는 그를 나락으로 몰고 간 악역으로 '아이언맨'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연기한 루이스 스트로스란 인물을 등장시킨다.
해군 장교 출신 사업가였던 스트로스가 처음부터 오펜하이머에 적대적이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방사성 동위원소 수출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스트로스에 대해 오펜하이머는 그런 식이면 핵폭탄을 만드는 덴 맥주도 필요하다며 그를 공개적으로 조롱한다. 비범한 천재에게 무시당한 범인(凡人)이 앙심을 품게 되면서 오펜하이머의 인생은 나락으로 향하게 된다. 오펜하이머에 대한 스트로스의 감정은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에게 조롱당한 뒤 열등감과 질투심에 사로잡혀 결국 살인에 이르게 된 살리에리를 떠올리게 한다.
누군가에게 앙심을 품으면 그를 싫어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유를 찾게 된다. 하지만 이미 증오로 객관성을 잃을 상태에서 찾아내는 이유들은 '팩트'가 아닌 '상상'일 가능성이 크다. 스트로스가 자신이 오펜하이머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고 스스로 믿게 만든 대표적인 사건은 영화 초반부와 후반부에 등장하는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의 만남이다. 스트로스는 두 사람이 호숫가에서 대화를 나눈 뒤 자신이 다가가자 자신을 대하는 아인슈타인의 태도가 달라졌다고 느낀다. 이러한 느낌은 상상의 나래를 거쳐 믿음이 되고 확신이 된다.
'오펜하이머가 나와 아인슈타인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 내 험담을 한 것이 틀림없어!'
사실 이런 식의 상상은 일상에서 흔히 일어난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직접 보거나 듣지 못한 부분을 부지불식간에 상상력으로 채워 넣곤 한다.
정신과 전문의로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란 베스트셀러를 낸 김혜남 작가는 또 다른 베스트셀러 <심리학이 서른 살에게 답하다>에서 우리가 직장에서 흔히 겪을 수 있는 구체적인 오해 사례를 소개한다.
아침에 부장님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는데 부장님의 표정이 좋지 않았을 때 '부장님이 나를 싫어하는 것 아냐'라고 생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인사를 받기 전 거래처에서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겼다는 보고를 받았거나 집안 일로 골치가 아팠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어떤 속사정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다른 합리적인 이유를 찾기보다 자신에게서 이유(나를 싫어한다고 생각)를 찾는 행동을 김혜남 작가는 '독심술'이라고 명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독심술이란 "충분한 근거 없이 모호하고 사소한 단서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함부로 단정하는 사고의 오류"를 가리킨다.
영화 오펜하이머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 초반부에 등장한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의 대화 장면을 다시 보여준다. 이때 처음엔 들려주지 않았던 둘 사이의 대화 내용을 공개한다. 당연하게도 이들의 대화에서 스트로스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오히려 자신을 한물 간 '올드 보이' 취급하는 오펜하이머를 위시한 신진 과학자들에 대한 서운함을 표현한다. 그러면서 오펜하이머 당신도 언젠가는 자신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 직후 아인슈타인과 마주친 스트로스는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던 아인슈타인의 씁쓸한 표정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고 오해한다.
스트로스란 인물은 반갑게 인사를 안 받아주는 부장님에 대해 '독심술'을 부리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그런 평범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트로스가 우리와 다른 것은 그가 그저 뒷담화로 자신의 분한 감정을 해소하는 범부(凡夫)가 아닌, 권력자였다는 점이다. 오펜하이머의 비극은 스트로스가 자신에게 가진 열등감이 자신을 향한 칼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인류를 파괴하는 위력을 가진 핵폭탄을 개발한 오펜하이머를 파국으로 몰아간 것은 정적 스트로스가 이렇다 할 근거 없이 멋대로 그의 마음을 읽어낸 독심술이었다. 이처럼 어설픈 독심술은 증오를 부추기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파괴한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필요한 건 상대방의 마음을 지레짐작하는 독심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얘기를 주의 깊게 듣는 경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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