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모르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 각자의 인생이 있을 뿐이다
군대에 입대해 막 훈련소 생활을 시작했을 때다. 훈련소에선 속옷이나 양말을 직접 손빨래해서 입어야 하는 터라 태어나서 처음으로 손빨래라는 걸 하게 됐다. 마침 빨래판이 있길래 이걸 써보기로 했다. 일단 빨래판에 팬티를 올려놓고 오른손에 보급받은 빨래 비누를 쥐고는 이리저리 문질렀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거품은 나지 않고 빨래판은 또 어떻게 쓰는 건지도 모르겠고 순간 막막해진 나머지 눈물이 핑 돌았다.
대체 남들은 어떻게 손빨래를 하는지 궁금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마침 옆에서 손빨래를 하는 동기 훈련병이 있었다. 그 친구는 비누를 슥슥 문지르더니 능숙하게 빨래판을 이용해 손빨래를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웠기에 '군대 오기 전에 손빨래 꽤나 해봤구나' 하고 생각했다.
곁눈질로 그 친구가 빨래하는 모습을 훔쳐보며 손빨래를 끝마쳤다. 궁금한 나머지, 세면장을 나오면서 아직 남은 빨래에 열심인 그 친구에게 물어봤다. "군대 오기 전에 손빨래 많이 해봤어요?"
그 친구 왈, "무슨 소리예요. 나도 오늘 처음 해봐요."
살다 보면 나는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막막한데 남들은 너무 능숙하게 그 일을 해내는 듯한 모습을 보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 쉽게 하는 일을 나 혼자 헤매고 있는 걸 보면서 '내가 머리가 나쁜가' 혹은 '이 길이 내 길이 아닌 건가' 하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곤 한다.
어릴 땐 유독 머리가 좋아 보이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적은 노력으로 쉽게 좋은 결과를 얻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친구들한텐 인생이 참 쉬워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쏟은 노력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고 당시의 나는 그런 속내를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는 걸.
그나마 고등학교 때까진 막막함이 덜하다. 입시라는 공동의 목적을 공유하다 보니 적어도 다들 같은 방향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다. 하지만 대학에 가고 특히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각자 행선지가 달라진다. 누구한테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도 막막하다. 각자가 처한 환경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언젠가 외할머니가 혼잣말로 '마음은 아직도 이팔청춘인데'라고 하시는 걸 들었다. 그땐 할머니에게도 십대 시절이 있었다는 게 상상이 가질 않았다. 부모님도 마찬가지다. 자식 입장에선 태어날 때부터 내 부모였기에 그들에게 부모 이전의 삶이 있었다는 게 좀처럼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이제는 알 것 같다. 내 눈엔 남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고 당연해 보이지만 그들 역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걸. 내 마음속 자아는 좌충우돌 고등학생 시절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는데 살면서 회사에서의 직책, 남편, 아빠라는 새로운 역할이 주어지면 그때그때 그 역할에 맞춰 어색하지 않게 행동했다. 마치 남들이 보기엔 태어날 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새로운 역할에 적응을 해나가다 문득, 주변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특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우리 아들이 이제는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는 게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아빠의 막막함을 알 리 없는 아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뭔가 있는 척을 한다. 어느 영화 제목처럼 그렇게 아버지가 되는 건지 모르겠다.
인생을 살면서 겪는 불안의 근원은 누구나 인생을 처음 살아보기 때문이다. 자꾸 다른 사람들의 SNS를 들여다보고 일이 안 풀리면 점집을 기웃거리는 건 혹시라도 나만 모르는 인생의 모범답안 같은 게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해서가 아닐까. 하지만 인생에 정답이 어디 있겠는가. 그저 각자의 인생이 있을 뿐이다.
영화 번역가 황석희씨가 쓴 칼럼에서 본 영화 속 대사가 마음에 와닿았다.
“세상을 모르는 건 누구나 다 마찬가지야. 자기들 인생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뿐이지(You know, the truth is nobody knows what they’re doing anymore than the rest of us. We’re all just trying to figure out our shit).” <영화 ‘예스, 갓, 예스(Yes, God, Yes)' 중에서>
누구나 처음 사는 인생, 누군들 인생이 뭔지 알겠는가.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 애쓰고 있을 뿐. 오늘도 시행착오를 겪으며 좌절하는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말자. 자꾸 틀리고 어색한 게 당연한 거야. 너도 처음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