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16주 중반, 반려와 함께 3박 4일간 룩셈부르크 여행을 다녀왔다. 임신이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 떠나는 여행이라 하면 보통 '태교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이겠지만, 이번 여행에 그런 이름을 붙이기는 조금 겸연쩍다. 평소 집에 본드로 붙여 놓은 듯 사는 사람이라 '여행'이란 단어는 나의 구미를 당길 힘이 없고, '아기 낳으면 여행하기 힘드니까'라는 이유를 붙이기에도 여전히 '여행'보다는 '집'이 좋으니까.
다만 입덧이 절정이던 한 달 반가량, 나 대신 모든 살림을 맡아 준 반려에게 뭔가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와 같은 내향형이면서도 여행을 좋아하는 반려를 위해 벨기에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룩셈부르크로 짧은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반려의 말로는 기차를 타고 가는 시간보다 자동차로 국경을 건너는 편이 빠르다고 하여 직접 차를 몰고 가기로 했다.
약 1시간을 달려 도착한 휴게소에서 간식거리를 사 먹고, 다시 1시간을 달려 예약한 호텔 주차장에 도착했다. 룩셈부르크 국경을 건널 때부터 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지더니 호텔로 들어가는 찰나에는 우산을 쓰기에 조금 민망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처음 호텔 방에 들어섰을 때 눈으로 보기엔 꽤 널찍하고 깔끔했으나, 뭔가 비린내 같은 것이 느껴졌다. 후각이 예민한 편이 아니어서 당장 확신은 들지 않았으나 호텔 방 같지 않게 냄새가 영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도 참 둔한 것이 바로 이때 방을 바꿔달라고 요청했어야 했는데 때를 놓쳐 버렸다. 내가 맡은 이상한 냄새는 매번 외출했다 들어올 때마다 표정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처음 방에 들어올 때 비가 오고 있어서 비 냄새인가 싶었지만, 계속 맡다 보니 쓰레기 썩는 냄새와 더 비슷했다.
이 호텔을 선택한 이유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묵었던 호텔과 같은 체인 호텔이기 때문이었다. 좋은 기억만 남겨 준 코펜하겐의 그 호텔을 다시 경험하고 싶어 고민 없이 결정했는데, 세 번의 밤을 보내는 동안 조금 꺼림칙하고 불현듯 찝찝했다. 혹시 옷이나 소지품에 이 꼬질꼬질한 냄새가 따라붙어 우리를 스쳐 지나는 사람들이 뒤돌아 쳐다보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아무리 폭염이 드문 곳이라곤 하지만 에어컨마저 작동이 되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내 생애 겪은 모든 호텔 중 최악의 호텔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호텔 방의 구릿한 냄새만 빼면 이번 여행의 모든 것이 상상 이상으로 좋았다. 오락가락하는 날씨야 벨기에도 별다를 것 없으니 그렇다 치고, 7월의 극성수기임에도 다른 관광객의 어깨에 치일 일이 없다는 것은 인구 밀도가 높아지면 불쾌지수도 절로 높아지는 나 같은 사람에겐 아주 큰 장점이었다.
게다가 시내 안에서라면 많이 걷지 않아도 예쁜 풍경을 모두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감사한 일이었다. 평소 반려와 함께 여행을 가면 하루 평균 2, 3만 보를 걷는데, 이번엔 하루 1만 보만 걸어도 부족하지 않게 느껴졌다. 임신 중기에 들어서며 몸이 퍽 가벼워지긴 했지만 예전처럼 많이 걷기가 부담스러웠는데 '도시'보다는 '동네' 같은 분위기 덕분에 한결 수월한 여행을 했다.
첫째 날은 비 내리는 시내를 걸으며 벨기에와는 다른 동화 같은 풍경을 눈에 담았고, 둘째 날은 National Art and History Museum에 갔다. 상설 전시는 무료이고, 특별 전시까지 보려면 1인당 €7의 티켓을 구매해야 했다. 난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으나, 예술에 관심이 많은 반려를 위해 티켓을 사기로 했다. 사실 난 예술에 있어서는 까막눈이라 유명한 작품을 볼 때도 큰 감흥을 느낀 적이 없는데, 이번 여행은 온전히 반려의 취향을 맞춰 주기로 결심하고 왔으니 일정부터 음식까지 모두 반려의 만족을 최우선에 두기로 했다.
시내가 워낙 작다 보니 우리 마음에 쏙 드는 카페를 찾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정 사이사이 쉬어 갈 만한 적당한 카페를 찾기 어려워서 시내 구경을 했던 첫째 날과 둘째 날 모두 같은 카페에서 휴식을 취했다. 'Konrad'라는 이름을 가진 카페였는데, 겉에서 보면 크지 않아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지하에도 좌석이 있어 꽤 많은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첫날 Konrad에 갔을 때 카페인 보충이 필요했던 반려는 에스프레소, 나는 복숭아 주스를 주문했다. 당연히 생과일주스를 상상하고 주문한 것이었는데 벨기에 브랜드의 병 음료를 내어 주기에 조금 김이 샜다. 입이 심심하다는 반려를 위해 샌드위치도 하나 주문했고,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샌드위치를 떠올리며 '우리 주문을 잊었음에 틀림없어'라고 생각할 때쯤 어려 보이는 직원이 따끈따끈한 샌드위치를 내어 주었다. 평소 샌드위치라면 차가운 간식인 줄만 알았는데, 좋은 빵에 신선한 재료를 넣고 따뜻하게 구워 낸 샌드위치가 그리 생경한 기쁨으로 기억에 남을 줄이야.
둘째 날도 다른 카페를 찾다가 결국 다시 Konrad로 향했다. 어제 먹었던 샌드위치가 다시 먹고 싶다는 반려의 의견이었다. 이번엔 지하 좌석으로 내려갔고 반려는 아메리카노, 나는 핫 초콜릿을 주문했다. 어제보다 더 사람이 많았지만 어제처럼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금세 샌드위치가 준비되었다. 어제와는 다른 빵이었으나 이날의 빵도 충분히 고급진 느낌이었다.
사실 대도시였다면 특별할 것 없는 카페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좁디좁은 룩셈부르크 시내 안에서는 적당히 힙하고, 꽤 괜찮은 샌드위치를 만드는 카페였다고 생각한다. 무대 의상으로나 입을 법한 은색 반짝이 나팔바지를 입고 있던 남자 손님이나, 가족 단위로 삼삼오오 놀러 온 여러 국적의 손님을 구경하며 편히 쉴 수 있었던 둥지 같은 곳이어서 한동안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둘째 날 저녁으로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포르투갈 레스토랑에 예약을 해 두었다. 반려의 회사 동료 중 여자와 결혼한 여자 동료가 있는데, 그 파트너가 포르투갈 사람이다. 우리가 룩셈부르크에 간다고 하니 맛있는 포르투갈 레스토랑이 있다며 추천해 준 곳이었다.
사실 나에게 포르투갈은 좋지 않은 기억이다. 결혼 2주년 여행으로 포르투갈 포르투에 갔었는데, 머물렀던 호텔이 우리가 주문한 룸서비스 외에 다른 음식과 음료도 함께 적힌 영수증을 내밀었다. 포르투갈어로 적힌 영수증이라 눈속임하기 쉬울 것이라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웬만한 유럽 언어를 조금씩 하는 반려 덕분에 우리가 주문하지 않은 내역이 영수증에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이미 결제를 마친 후여서 영수증을 들고 데스크로 내려가 환불을 요구했다. 나이가 쉰은 넘어 보이는 베테랑 여자 호텔리어가 미안하다며 연신 반려와 내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실수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마주 웃어 줄 수가 없었다. 흔히 '눈탱이 맞았다'라고 표현하는 딱 그 느낌이었던 것 같다.
이 사건 외에도 좁은 도로에 무지막지하게 넘쳐나는 교통량으로 인해 10분 거리를 40분이 걸려 도착하는 일이 빈번했고, 이런 나쁜 기억들 때문인지 포르투갈에서 좋았던 점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맛있는 식당도 하나쯤은 있었을 테고, 아름다웠던 풍경도 한 번쯤은 봤을 텐데, 기억이 새하얗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룩셈부르크까지 와서 포르투갈 음식을 먹으러 간 것은 반려가 먹고 싶은 음식을 잔뜩 먹게 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반려는 한국 음식도 가리지 않고 잘 먹지만 유럽 음식 중에서는 지중해식을 좋아한다.
시내에서 1번 트램을 타고 25분을 달려 한적한 동네에 도착했다. 룩셈부르크는 대중교통이 무료여서 한번 타 보고 싶었는데, 대중교통비가 장난 아닌 영국보다 훨씬 깨끗했다. '이렇게 부자 나라 시민으로 태어나면 어떤 느낌일까'를 상상하다 보니 금세 내려야 할 정류장에 도착했다.
예약 시간인 7시에 딱 맞춰 식당에 도착했고 가게 안에 들어서자마자 화려한 조명 인테리어가 눈길을 끌었다. 가끔 비싼 레스토랑에 가면 특유의 분위기가 풍기는 위압감에 음식 맛이 잘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아 부담스러워하는 편인데, 이곳은 세련되게 잘 꾸며져 있지만 편안하게 얘기도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반려의 이름을 대며 이미 예약을 했다고 말하니 입구에서 멀찍이 떨어진 매장 안쪽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조명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캣워크 같은 테이블에서 이미 많은 손님들이 식사를 하며 수다를 떨고 있었지만, 그 화려한 공간을 지나 주위에 아무도 앉아 있지 않은 한산한 테이블에 자리를 내주었다. 심지어 우리 주변 테이블은 아직 손님을 맞을 준비가 안 되어 있었고, 커트러리를 세팅하고 있는 직원들도 보였다.
'아니, 저렇게 예쁜 공간을 놔두고 굳이 다른 손님들과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힐 건 뭐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자꾸만 수많은 조명으로 반짝이고 있는 테이블을 바라보게 되었다. 자꾸 뒤를 돌아보는 내 눈빛을 읽었는지 직원이 내 눈치를 살폈다. 물론 우리가 있던 공간도 예뻤지만, 마치 섬이 된 것만 같았다. '유일한 동양인이라 서양인들 사이로 앉히고 싶지 않다는 건가?' 하는 자격지심 비슷한 감정까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렇잖아도 포르투갈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은데, 역시 나랑 포르투갈은 궁합이 안 맞는 곳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식사를 하러 왔으니 밥은 먹고 가야겠기에 주문을 했다. 애피타이저로 올리브와 버섯 요리를, 메인으로 반려를 위한 스테이크와 날 위한 닭 요리를 선택했다.
애피타이저를 먹는 동안 우리 주변으로 두 테이블이 채워졌고, 메인 메뉴가 나왔을 때는 큰 테이블을 예약한 단체 손님이 나타났다. 그리고 디저트를 먹는 동안에는 거의 30명에 달하는 한 무리가 나타나 남은 자리가 빽빽하게 채워졌다. 내가 동양인이라 한적한 공간으로 안내했다는 오해가, 민망할 정도로 스르르 풀려 버렸다. 우리가 안내된 공간은 예약 손님을 위한 공간이었고, 심지어 식사를 마칠 때쯤에는 대기 손님이 있을 만큼 바쁜 식당이었다. 일부러 동양인인 나만 '한적한 곳'에 앉힐 수도 없었던 것이다.
손님이 가득 찬 식당을 나오면서 '이런 자격지심은 개인적인 문제일까? 아니면 민족적 자격지심일까?'에 대해 잠시 궁금증이 일었다. 또 몇 년이나 유럽에 더 살면 이런 생각을 안 하게 될지에 대해서도 아주 잠깐 상상해 보았다.
셋째 날, 자동차를 타고 룩셈부르크 시내를 벗어났다. 요 며칠 비가 내렸다는 것이 거짓말처럼 하늘이 맑았다. 날씨가 좋은 것만으로도 선물 받은 기분이 드는 건 유럽에 살며 생긴 습관일 것이다.
약 45분을 달려 도착한 성. 실제로 보면 백설공주가 살았을 것 같은 느낌인데, 주변 지형들 때문에 성 전체의 모습이 나오는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워낙 언덕에 있는데다 주민들이 거주하는 공간도 있어서 동화 같은 풀샷은 팸플릿으로만 볼 수 있었다.
반려의 말로는 '보통 유럽 사람들이 동화 속에 나오는 성을 생각할 때 룩셈부르크를 떠올린다'라고 하더니, 실로 동화가 쓰여질 만큼 아늑하고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이 성의 입장료도 €7였는데, 룩셈부르크에 와서 티켓을 살 때마다 "어디서 오셨어요?"라는 질문을 들었다. 그때마다 '벨기에'라고 대답했고, 정가로 계산했다. 혹시 룩셈부르크 주민이면 할인이 되는 걸까.
실제 성으로 지어진 공간이다 보니 높은 곳에 위치해 있고 성 안에서도 오르막길이 많았다. 이날 활동이 편한 임부복 점프수트를 입고 가서 누가 봐도 임신 중인 것이 티가 났는데,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이 수시로 느껴졌다. 오르막길을 거침없이 오르는 내 모습을 보고, 반려도 몇 번이나 괜찮냐고 물었는지 모르겠다. '이제 중기에 접어들었으니 많이 걸어 줘야 아기한테도 좋다'라고 말하며 씩씩하게 걸었다. 비가 많이 내렸던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룩셈부르크 시골의 풍경은. . . 황홀 그 자체였다. 대도시에서 태어나 대만 타이난에서 지낸 1년을 제외하면 평생을 도시에서만 살았다. 하지만 내 진짜 꿈은 '자연 속에서 순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다시금 나의 꿈이 떠오르게 하는 장소였다. 언젠가는 시골 태생인 반려와 자연과 가까운 곳으로 돌아가 순하게 살다가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다.
오후 늦게 호텔로 돌아왔다. 그렇게 많이 걸었는데도 여전히 더 걷고 싶었고, 마음이 통한 반려와 나는 이미 익숙해진 시내를 아주 오랫동안 걷고 또 걸었다. 비록 배속에 있지만 우리 아기와 함께한 첫 여행이었다. 흐린 날도 좋았고, 맑은 날도 기뻤다. 고생한 반려를 위해 떠났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내가 행복해졌다. 반려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될 수 있어서 실로 감사한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