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와 나는 결혼식과 웨딩 사진 등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혼인 신고만으로 법적 부부가 되었다. 두 사람 모두 결혼식 준비에 힘을 빼고 싶지 않았고, 멋들어진 결혼식을 하는 것보다 부부가 되어 잘 사는 것에 집중하고 싶다는 마음이 통했기 때문이다. 다만 새로운 가정의 출발을 기념하는 의미로 한국에서 혼인 신고를 하는 날 근처 흑백사진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한 장 찍기로 했다. 마침 한산했던 스튜디오 분위기 덕분에 한 명의 사진사와 한 명의 직원이 온전히 우리 작업에 집중해 주었고, 다른 고객들보다 좀 더 많은 수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사진 촬영이 끝나고 친절한 직원이 우리에게 모니터를 보여주며 사진을 고르게 했고, 2D 사진으로 본 반려와 나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내 이목구비가 뛰어나진 못해도 사회생활 하는 데 있어서는 부족함 없는 평범한 외모라 여겼는데, 반려 옆에 있는 내 얼굴은 긴 머리카락을 가진 오징어 같았다. 반려의 1.5배는 되어 보이는 넙데데한 얼굴 면적과 반려 눈의 1/3로 보이는 작고 좁은 눈, 웃을 때 입꼬리가 올라가는 반려와는 달리 옆으로만 찢어지는 어색한 입꼬리. "사진 수정은 저만 필요하겠는데요."라는 내 자조적인 말을 듣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던 직원의 반응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배 속의 아이가 딸이라는 것을 안 이후로 '부디, 반드시, 꼭 아빠를 닮아야 하는데…'라는 생각에 한동안 사로잡혀 있었다. 아직 얼굴이 잘 보이지도 않는 초음파 사진을 보고 또 보면서 "광대뼈랑 턱뼈가 얄브스름하니 딱 여보를 닮았어. 그렇지?"라며 반려를 향해 중얼대곤 했지만, 실은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짙은 선글라스를 써도 사각으로 발달한 광대뼈와 턱뼈로 인해 아시안인 유전자를 숨길 수 없는 나를 닮지 않길 바란 마음은 잠시 잊고 지낸 외모 지상주의의 발현이기도 했고, 한국 사회에서 자라며 새겨진 후천적 본능이기도 했다. 더구나 우리 딸은 영국인 아버지를 둔 혼혈이니까 '굳이' 아시안인 어머니를 닮을 필요가 없다는 바람이 꽤나 이성적인 기대라고 믿고 싶었다.
벨기에 산부인과에서도 임신 20주 차가 되면 정밀 초음파를 진행하여 태아를 자세히 관찰한다. 12주 차에 본 정밀 초음파에서 4D 초음파로 아기를 보긴 했지만, 이목구비는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20주 차 진료가 기다려졌다. 약 30분간 진행된 정밀 초음파에서 우리 아기의 모든 수치가 정상 수치 안에 있다며, 잘 자라고 있다는 말을 하는 의사의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그 표정에 덩달아 내 마음도 편안해졌다. 벌써 성인의 것과 똑같은 모양을 한 척추의 모습을 보며 반려와 동시에 탄성을 내뱉기도 했다. 이번에는 아기 사진을 예쁘게 찍어 주겠다며 4D 화면을 띄운 의사는 초음파 기계로 내 배를 엄청나게 흔들어 댔다. 혹시라도 내가 놀랄까 봐 아기의 자세를 바꾸기 위한 행동이라 설명해 주었고, 나는 내 걱정보다는 아기가 지진이 난 것처럼 불안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초음파를 보는 동안 계속해서 '찌직' 거리며 프린터가 작동되는 소리를 들었다. 진료실에서 나와 사진을 확인해 보니 10장이 넘는 초음파 사진이 우리 손에 들려 있었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내내 아기의 사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운전에 집중한 반려가 내 말을 다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건 귀라고 하셨지?', '발이 눈앞에 있어. 유연성이 어마어마해.', '초기엔 심장이 몸의 전부인 것처럼 보였는데, 이젠 진짜 조그맣다. 그렇지?' 라며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기의 전신이 모두 궁금하면서도 특히 내 시선을 잡아당긴 것은 4D로 찍힌 아기의 얼굴이었다. 집에 도착해 식탁 테이블에 앉을 때도 내 손에는 초음파 사진이 들려 있었다. 아직 의자에 앉지 않고 서서 물을 마시는 반려에게 "나보다는 여보를 닮은 것 같아. 얼굴형이 딱 그래."라고 말하며 고개를 들어 반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내 말을 들은 반려는 고개를 꺾어 사진을 다시 보더니 "음, 그런가? 광대가 살짝 여보를 닮은 것 같은데?"라고 대답했다. 그 당시 살짝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은 실은 내 마음속에서 아기의 외모가 엄마인 나보다는 아빠를 닮길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챈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혼혈아는 예쁘다'는 편견이나 '여자의 외모가 예쁘면 조금 더 수월한 인생을 살 것'이라는 편견이 내 안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딸이 자라는 동안 우주처럼 의지하고 믿고 따를 엄마가 될 사람이 겨우 겉모습에만 치중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적어도 엄마라면, 적어도 부모라면, 내 자식이 가진 겉모습 그 이상 혹은 심연과도 같은 내면에 관심을 가져 주어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부끄러웠고 곧 반성의 시간이 이어졌다. 임신하기 전에 반려와 긴 대화를 나누며 크든 작든 장애가 있는 아이가 태어나도 우리의 아이로 잘 키우자는 약속도 했으면서, 모든 것이 정상이라는 아이에게 어째서 '더욱 예쁠 것'을 기대하며 바라고 있었을까. 게다가 '예쁜 외모'의 기준이 스스로가 아닌 세상이 만든 것임을 알면서도 벌써부터 그 틀 안에 아이를 넣어서 재단하고 있었다는 것에 약간은 죄스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좋은 엄마가 되려면 한참 더 멀고 먼 길을 가야만 할 것 같다.
"소중한 내 딸. 적어도 엄마는 너를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한다. 너의 외모나 재능, 성적 취향 혹은 어떤 것이든 너의 만족과 행복을 가장 중요히 여길 것이다. 여기 많은 사람들 앞에서 굳게 약속한다. 딱 20주만 더 엄마 배 속에 있다가 건강히 만나자.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