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과학> (김범준) 서평
나는 전형적인 문과다.
작가를 준비하고 있는 지금도 그렇지만 고등학생 때도 나의 문과생으로서의 자질(?)은 충만했다. 언어, 사회 탐구 영역은 좋아하기도 했고 잘하기도 했지만, 수학과 과학은 제목만 들어도 머리가 아팠다. 그나마 과학 중에 생물이나 화학은 나름 재미있었으나 물리는 내겐 너무나도 먼 존재였다. 수학을 잘하지 못했기에 물리도 열심히 죽을 쒔고 그러다보니 물리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힘든-과 실제적인 공포-성적이 바닥을 쳤다-가 있었다.
서평단을 신청할 때 책 제목이 “관계의 물리학”이었다면, 아마 내 망설임은 100점 만점에 90점 정도는 되었을 거다. 다행이도 “관계의 과학”이라는 제목에 흥미를 느껴-특이한 제목의 마력에 굴복했다-“통계물리학”이라는 생소한 학문의 이름이 적힌 부제도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나는 어떤 사건이나 상황, 사회 현상을 볼 때마다 단일 요소가 아닌 다각도에서 접근하려고 한다. 내가 전공-심리학-시간에 알게 된 생물심리사회 모델-이상 행동과 정신 장애에 영향을 미치는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변인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모델(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생물학적 요인과 사회적 요인, 심리적 요인을 동시에 다뤄야 하고 이것들이 서로 상호작용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이 이론에 감명받은-이전부터 단일 이론이나 특정 요소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느꼈기 때문에-나는 그 후 이런 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낯설고 두려운, 미지의 세계인 통계물리학에 선 듯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저자가 소개하듯 통계물리학은 “많은 구성요소들이 모여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상호작용할 때, 전체가 어떤 거시적인 특성을 새롭게 만들어내는지가 주된 관심”이기 때문이다. 이점이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물심리사회 모델에 대한 관심과 맞아떨어졌다.
이렇게 흥미를 가지고 책을 펼쳤지만, 진성 문과답게 이론적인 부분을 이해하기가 조금 어려웠다. 각종 함수들과 생소한 과학, 수학 용어가 나를 시험에 빠지게 했지만, 연구 결과에 대한 해석들이 매우 흥미롭고 생각할 만한 주제들을 던져주었기에 무사히 시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대다수의 과학적 발견은 일반 대중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한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과학도 여러 분야로 세분화되었기 때문도 있지만, 그 발견을 체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의 설명이 있다해도 ‘아 그런가보다’하거나 어떤 상을 받고-노벨상이라든가-한번 쯤은 들어봤을 유명 학술지에 실려야 해당 연구가 중요하다는 것을 조금 알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학문적 성취와 대중의 이해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발견이 그저 발견에 그치지 않고 발전으로 이어지려면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드러나야 한다.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설명을 통해 지적으로든 생활에서든 실제적인 변화 혹은 진보가 이루어져야 진정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관계의 과학>은 다소 생소한 ‘통계물리학’이 어떤 학문이고, 이 학문에서 발견한 것들이 실제로 어떻게 쓰이는지, 더 나아가 우리 생활에서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알려준다.
책에 소개된 내용 중에 흥미로운 게 너무 많지만 그 중에 특히 내 눈길을 사로잡은 부분은 꿀벌의 춤과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 그리고 과학적 태도란 무엇인지 말하는 부분이었다.
누구나 한번쯤 벌집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한 때 시골에 살았던 나는 수박만한 말벌 집도, 이제 막 짓기 시작한 땅벌 집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심심찮게 보이는 빈 벌집들을 보며 벌도 이사를 간다는 게 신기했고 과연 벌들은 어떻게 이사를 하는 걸까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책에 의하면, 꿀벌 집단은 인구(?) 수가 많아지면 분가를 한다고 한다. 여러 꿀벌들이 각자 후보지를 고른 뒤에 다른 꿀벌들에게 자기가 선택한 후보지에 대한 정보를 춤으로 알린다. 춤으로 후보지에 대한 PR을 하는 것이다.
춤으로 설명을 한다는 것도 흥미로운데 더 놀라운 건 꿀벌들의 의사결정 과정이다. 꿀벌들은 신중하게 결정하는데 놀랍게도 다른 꿀벌들이 선택한 후보지에도 가본다. 자기의 선택을 주장하면서도 다른 꿀벌들의 선택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고-이것도 정말 놀라운데-만약 다른 꿀벌의 후보지가 더 좋을 경우 자신의 선택을 과감히 버리고 그 꿀벌의 춤에 합류한다. 이런 과정은 최종 후보지가 결정될 때까지 반복하며 그 가운데서 탐색과 협의가 천천히 진행된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꿀벌들은 “다수의견이라고 무조건 따르지도, 소수의견이라고 무조건 무시하지 않”는다. 더 좋은 선택이 있다면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지 않는 유연성과 시간이 걸리더라도 협의를 지속하는 과정은 민주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게 인간은 자신의 선택을 바꾸는데 인색하다. 그리고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는 것 또한 싫어한다.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더 나은 선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든 모르든 일단 한 번 선택하면 그것의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의 선택을 유지하려는 성향이 있다. 심지어 자신의 선택을 고수하기 위해 현실을 왜곡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의사 결정 과정에서 소수 의견을 무시하거나 서로 다른 의견들 가운데서 협의하기보다는 좀 더 우월한 위치에 있는 의견을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다. 어떻게 보면 시간을 절약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다수의 횡포’에 가까울 수 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또한 정치적, 이념적 갈등이 존재한다. 정치 성향의 차이는 관계를 맺는 집단의 차이도 만들어 낸다.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하고만 무리를 짓는다는 거다. 그렇다보니 그 차이는 더욱더 심화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같은 시공간을 살면서도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사는 것처럼 유리될 수 있다. 꿀벌들의 의사결정 과정은 우리가 더 나은 선택을 위해,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유연성을 가져야 하며 비록 시간은 걸리더라도 자기와 반대 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과 지속적인 소통과 협의를 지속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통계물리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상만사를 다루기에 과학적 사실이나 현상을 분석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러다보니 다소 딱딱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느낄 때쯤 감동(?)을 받은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아름다움”에 대한 내용이었다.
“아름다움은 대상과 나 사이의, 사랑과 비슷한 상호작용이다. 내가 준비되었을 때에만 찾아오는 관계 맺음이다. 길들여야 할 것은 여우만이 아니다. 스스로를 길들인 후에야 아름다움은 나를 찾아온다.”
이 문장들만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어느 작가가 한 말 같지만, 순수한(?) 저자의 글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우리가 흔히 사랑의 문제를 대상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라 개개인의 성숙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아름다움 또한 마찬가지여서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도 준비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마지막으로 “과학적 태도”에 대한 저자의 말은 내게 과학적 태도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과학적 태도란 무엇일까. 그것은 “결과뿐 아니라 그 결과가 얻어진 과정도 항상 의심의 눈으로 봐야 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과학은 “지식의 총합이라기보다는 대상을 바라보는 사유의 방식”이다. 저자가 과학자가 아닌 우리에게도 과학적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가 과학자처럼 살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과학자가 연구 대상을 대하는 자세를 우리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은 완벽함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저자의 말처럼 과학은 축적된 객관적 결과를 바탕으로 “현재 내릴 수 있는 그나마 가장 정합적이고 합리적인 최선의 주장을 하는 것”이고 따라서 “완벽하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비판과 검증에 열려 있기 때문에 가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과학적 태도는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들에 대해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이성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또한 이 결정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을 염두해두고 비판과 검증에 유연해야 한다. 과학의 발전사는 비판과 검증의 반복이었고 기존의 이론을 수정하고 보완하며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진실의 맨 얼굴을 쳐다볼 용기”였다. 우리는 객관성과 이성을 토대로 진실을 직시할 줄 아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진실은 결코 따듯하거나 아름다움으로만 채워져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일 경우가 많다.
책을 읽으면서 연구 결과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그것들이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 어떤 점을 시사하는지 살펴보고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평소 궁금했거나 조금은 알고 있던 내용이 나올 때는 호기심 많은 꼬마로 돌아간 느낌도 들었다. 과학과 수학에 약한 사람에게는 진입장벽이 낮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장벽을 넘기 위한 시도를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좋은 책을 읽을 수 있게 해준 동아시아 출판사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