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는가

<약한 게 아니라 아팠던 것이다>(권순재) 서평

by Argo

알랭 드 보통은 <영혼의 미술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술적 경험의 가장 이상한 특징 중 하나는 가끔 눈물을 흘리게 할 정도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의 힘이다. (...) 예술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의외로 중요한 기능들 중 하나는, 고통을 보다 잘 견디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데 있다. (...) 예술은 인간의 조건인 고난을 웅대하고 진지하게 볼 수 있는 유리한 관점을 제공한다.”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예술은 우리에게 그저 미적인 만족감, 아름다움에 대한 경외 말고도 “고통을 보다 잘 견디는 법”을 알려준다. 우리는 예술을 통해 삶의 이모저모를 들여다보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슬픔과 고통, 상처를 견디는 힘을 얻는다.


때문에 심리학에서는 예술을 치유의 한 방편으로 주목해왔다. 특히 정신분석학은 예술을 예술가의 자기치유를 위한 노력의 산물로 보았다.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 도사리고 있는 아픔과 상처를 작품 속에 녹여냄으로써 스스로를 치유할 뿐만 아니라 그 작품을 접하는 사람들에게도 치유의 빛을 나누어 준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우리에게 삶의 파도를 헤치고 나아갈 수 있는 훌륭한 나침반이 될 수 있다. 글(시나리오)과 이미지(영상), 소리(배경음악)로 이루어진 영화는 기존의 예술 작품들보다 더 효과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린다(여기에는 비교적 접근하기 쉽다는 장점도 있다).


<약한 게 아니라 아팠던 것이다>는 앞에서 말한 영화의 장점을 살려 우리를 치유의 길로 인도하는 길라잡이다.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영화 속 등장인물과 상황을 심리학의 관점에서 분석하여 그 분석이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점을 시사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쉽게 알려준다. 딱딱한 심리학 서적을 읽으며 머리를 붙잡고 이해해야 할 개념이나 지식을 영화의 내용을 사례로 들어 설명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나에게 적용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23개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보면 한 사람 쯤은 나와 비슷한 사람(혹은 상황)을 만나게 되고 ‘아, 나도 그런데’ 혹은 ‘나도 저런 경험이 있었어, 지금 내 마음이 그래’라고 말하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영화를 통해 나 자신과 나의 삶, 내 안의 상처와 고통을 살펴보게 된다.


영화를 통해 심리학적 지식을 쉽게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다는 장점 말고도 지나친 ‘스포일러’가 없다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간혹 영화나 문학 작품 등을 다루는 책에서 너무 많은 정보를 제공해 해당 작품을 접하기 전에 흥미를 반감시키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영화와 심리학이 맞닿는 그 부분만 설명하기 때문에 다루는 영화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평소에 영화를 보면서 전공인 심리학을 기반으로 분석하는 걸 즐기는 나에게 이 책을 읽는 시간이 매우 흥미롭고 즐거웠다. 마치 마음이 맞는 사람, 나와 비슷한 유형의 사람과 앉아 영화와 그 영화 속에 담긴 심리학에 대해 대화를 하는 느낌을 받았다. 나처럼 분석하며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이 책을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생각보다 내가 봤던 영화가 안 나와서 조금 당황했다. 23개의 영화 중에 내가 본 영화는 고작 4개, 500일의 썸머, 이터널 선샤인, 설국열차, 록키 발보아 밖에 없었으니까. 봤던 영화가 안 나와서 아쉬웠지만 좋은 영화 19개를 알게 된 거니까 나름 만족한다.


딱딱한 심리학 서적이 아닌 영화를 통해 심리학을 접하고 싶은 사람, 영화의 심리학적 해석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인상 깊었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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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당신이 혹시 여전히 과거로부터 고통받고 있다면, 과거의 무력했던 자신을 너무 미워하거나 무가치하게 보거나 또는 잘라내야 할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과거의 일에 대하여 아파하고 후회하는 과정을 무언가 잘못되었거나 문제가 있다는 증거로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합니다. 일생동안 타인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은 이의 삶을 선하다고 보지 않는 것처럼 과거로부터 어떠한 상처도 영향도 받지 않은 인생을 우리는 좋은 인생이라 부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멜라니 클라인은 자신의 말년의 연구에서 인생의 전 과정은 그 자신과 타인에 대한 경험을 통합하려고 애쓰는 것이라 말합니다. 고통이라는 이름을 한 극복은 이미 시작되어 있어요. 당신이 과거의 자신을 포기하고 손을 놓지만 않으면, 분명 무언가 달라질 거예요. (35p)
이와 마찬가지로 고통과 슬픔을 인생에서 지우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고통으로, 슬픔을 슬픔으로 받아들이며 내면에서 고통과 슬픔의 의미에 대하여 성찰하며 다룰 수 있게 하는 것이 정신적 외상을 다루는 치료의 핵심이 아닐까 합니다. 과거를 극복하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 충분히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충분히 슬퍼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5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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