갭먼스와 현충일
어제는 현충일이었다. 달력에 6이라는 숫자가 붉게 칠해진 것처럼 내 마음도 붉게 달아올랐던 하루였다. 너무 답답하고 화가 치밀어올라서 브런치에 글을 쓸까하다가 정리되지 않은 감정으로 쓴 글이 좋지 않을 게 뻔했기에 그만두었다.
가정의 달 5월을 지나 호국의 달이라는 6월이 되면 내 가슴 한켠은 묵직해지고 숙연해진다. 18살에 교복 대신 군복을 입고 연필 대신 총을 잡아야 했던 할아버지 생각으로 가득해지기 때문이다. 내게 6월은 그런 달이다.
할아버지 회고록 작업이 끝나고 나서 한동안, 그리고 지금까지 기묘한 감정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근 2년간 매달려 온 작업을 끝냈으니 성취감과 뿌듯함, 홀가분함만 느껴질 줄 알았다. 적어도 최종 수정본을 만들 때까지는 그랬다. 아, 내가 이 어려운 걸 해냈구나, 이거 끝내면 미뤄왔던 계획들을 신나게 해보자, 이런 마음이었다.
하지만 모든 작업이 끝나고 최종 시안을 확정해 인쇄소로 넘겼을 때, 작업 후반부에 느꼈던 뿌듯함과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일상에 대한 기대감이 흐려지고 약간의 허무함과 허탈감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는 것을 느꼈다. 에너지도 거의 고갈되어 의욕이 거의 나지 않았다. 지난달 31일까지 써야했던 서평도 겨우 써 냈다.
내가 왜 이럴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2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그런 상황들 속에서 회고록을 하며 장기간 스트레스를 받아 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부모님의 이혼이라는 메인 사건 안에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다. 지난 겨울에는 다시 한 번 폐쇄병동의 문을 두드릴 것인지 말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기도 했다. 몸과 마음 모두 지칠 만한 사건들이 많았고 그런 상황들과 함께 회고록 작업을 병행하다보니 번아웃에 가까운 상황에 다다른 것 같다. 회고록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아 회고록 해야 하는데, 얼른 끝내야 하는데'라며 스트레스를 받았으니까.
도무지 나지 않는 의욕과 바닥을 치는 에너지 상태를 두고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갭먼스 - 갭이어의 축소판 - 를 가지기로 했다. 6월 한달을 보다 여유롭게 그리고 재충전의 시간으로 보내자 마음 먹은 것이다. 그래서 2일부터 무계획의 계획 속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하는 중이다.
그렇게 시작한 갭먼스의 생활은 나름대로 잘 굴러가는 중이다. 우선 파리의 시차로 살던 것을 한국의 시차에 맞게 조정하는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중이다. 갑자기 바꿀 수는 없기에 - 그렇게 할 수도 없고 - 새벽 3~4시에 자서 10시 정도에 일어난다. 하루 세끼도 꼬박 챙겨 먹고 있다. 몇 년 만에 제대로 된 아침을 먹다보니 어색하지만 이전처럼 살 때보다 더 나은 것 같다. 두끼 먹을 때보다 체중 감소도 있고 무엇보다 하루가 길어진 느낌이 든다. 아침 산책(혹은 운동)이 주는 상쾌함도 있고.
미뤄두었던 미래 계획, 소설 구상이나 장단기 계획은 조금 더 미뤄두고 있다. 회고록 작업을 하면서 의외로(?) 편집 분야가 나한테 어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고 책 만드는 것에 흥미도 느껴서 1인 출판이나 편집디자인 분야에 진출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고민도 하고 있다. 브레인스토밍하는 것처럼 가볍게 이런저런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이렇게 새로운 일상을 만들고 또 거기에 적응하는 과정 속에서 '정치적인' 생각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현충일 아침에 보게 된 기사가 그 원인이었다. 현충일 추념식에 제1·2연평해전,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도발의 유가족 및 생존자가 제외되었다는 내용의 기사(1)가 할아버지의 생애와 오버랩되어 분노를 느끼게 했다.
할아버지의 회고록 원본에는 이런 메모가 있다.
2010년 3월 26일 21:22분
세상에 이렇게 비참한 슬픔이 어디에 있으랴
조국은
천안함 772호
46용사들을
영원히 기억하리라
18살에 학도병으로 참전하기 위해 눈보라를 맞으며 부산에 내려가 훈련소에 입소, 19살의 나이에 하사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할아버지. 그 후 26살, 탑승한 트럭이 절벽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당해 20개월의 병상 생활 끝에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사회로 나가야 했던 할아버지께 천안함 희생자들은 남 같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얼마 전에 읽었던 천안함 생존자에 대한 기사(2) 내용이 더해져 안타까움과 함께 분노와 씁쓸함을 느꼈다.
흔히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다. 그리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 - 최근 자주 들리는 말이다 - 도 있다. 나는 천안함 사건과 할아버지의 삶을 보며 역사는 결국 반복되며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학도병으로 참전해 사선을 넘나들며 훈장까지 받았지만 부상 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 약도 의사도 없었고 시설도 열악해 "국군 환자 포로 수용소"라고 불러야 한다고 쓰셨을 정도다 - 죽을 뻔한 고비를 수차례 넘겨야 했고 얼마 되지 않는 지원금을 받고 제대해야 했다.(3)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가 차디찬 바다에서 생을 마감한 천안함 희생자들과 생존자들에 대한 정부의 대처와 우리의 반응은 반 세기 전과 다를 바가 없다. 똑같은 역사의 반복이고 이것은 곧 과거를 잊은 우리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뜻이다.
나는 이전에 쓴 몇몇 글에서 내 정치적 성향이 진보 혹은 보수로 확연히 구분되지 않는다고 했다(정확히는 둘 다 마음에 안들고 꼴보기 싫다고 썼다). 그러나 요즘은 굳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보수의 손을 들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소위 진보세력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행태에 넌덜머리가 났고 그들의 비도덕적이고 퇴보적인 모습은 둘째치더라도 북한에 대한 태도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며칠 전,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은 "갈 데까지 가보자"며 "적은 역시 적이라는 결론을 더욱 확고히 내렸다"고 말했다.(4) 나는 이 말에서 북한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깨달아야 한다고 본다. 우리는 - 적어도 진보는 - 북한을 대화의 파트너로 보고 있지만 북한은 우리를 "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동안 여러모로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지만 의미있고 실제적인 성과는 별로 없었다. 조금 진전되어 어떤 합의를 했다해도 그것을 어기는 모습을 이미 북한이 너무 많이 보여줬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6.25 전쟁을 비롯한 수차례 무력도발과 연평해전, 천안함 사건, 연평도 포격도발을 누가 일으켰는지. 지금까지 북한이 취한 태도와 저지른 일들을 보면 그들은 절대로 우리와 평화를 이야기할 준비도 안 되어 있고, 마음 또한 없다. 그들이 평화를 이야기할 때는 자신들이 불리할 때일 뿐이다. 그러니 제발 통일이라는 환상에 속아서 북한에 끌려다니지 말고 단호하고 주도적인 자세로 북한과의 관계를 정립해나갔으면 좋겠다.
(1)https://news.joins.com/article/23794321
(3) 기록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귀향 여비로 4,000환, 명예제대 보상금 15,000환을 받으셨다고 한다. 1955년 환율이 1달러에 500환이었다는 점, 시장에서 구입하신 운동화의 가격이 480환, 이발비가 250환이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터무니 없을 정도로 작은 금액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