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설날 무렵에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으니 약 4개월 만의 재회다. 그동안 주 1~2회 정도 통화를 했었기에 생각보다 엄청 반갑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냥 익숙한 느낌이랄까.
조울증 이후로 인간관계가 좁아진 것도 있지만 친구에 대한 정의에 인색한 나에게 - 친구란 지음, 관포지교와 같을 때만 쓸 수 있다. 그 외에는 지인, 아는 사람일 뿐 - 이 친구는 유일하게 서슴없이 친구라고 소개할 수 있는 사람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1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했고 어쩌면 부모나 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이이기에, 우리 사이에 쌓인 시간만큼이나 얽히고 설킨 신뢰와 이해는 4개월이라는 시간을 무색하게 했다.
친구의 입대와 어학연수를 제외하면 이번 코로나 사태로 만나지 못한 시간이 제일 긴 이별(?)이었다. 공무원이 되어 타 지방으로 발령이 난 친구는 그래도 1달에 1번은 본가로 올라왔고 그때마다 만나곤 했으니까.
차가 밀려 약속시간보다 15분 정도 늦게 온 친구를 타박하고 4개월 간의 변화를 체크한다. 살이 쪘다. 당연하다. 야근을 밥먹듯이 하는 것도 그 원인이겠지만 무엇보다 이 녀석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폭식하니까. 오랜 시간 함께했기에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완벽히는 아닐지라도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도 있지만 그런 것은 생각보다 적다. 단 몇 분의 통화만으로도 나는 친구의 마음이나 생각을 알아챌 수 있다. 이미 많은 데이터가 쌓여 있기에 쉽게 예상하고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비교적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그다지 애틋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쩌면 무관심해 보일지도 모르는 이런 모습은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을 함께해 서로에게 익숙해져버린 오래된 연인의 상태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함께 식사를 하고 까페에서 대화를 하다 피곤해보이는 친구를 일으켜 집으로 보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친구와의 만남에 대해 생각해봤다.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무덤덤함. 이것은 무관심일까, 아니면 권태일까? 하지만 나는 안다. 무관심과 무덤덤함으로만 보이는 이것이 결코 그런 것이 아님을. 내가 친구에게 느끼는 감정은 흥미를 잃어버린 관계에서 비롯되는 권태나 미움을 감추기 위한 무관심이 아니다. 우리 사이에 흐르고 있는 익숙함은 시간으로 인해 닳고 쇠퇴한, 희미해진 감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미 서로의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에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는 뜻이다. 마치 몇 년 동안 내 귀에서 함께하고 있는 피어싱을 평소에는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 얼마 후 잘 들어갔다는 친구의 카톡이 왔다. 나도 친구도 오늘 만나서 좋았다, 즐거웠다 이런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저 푹 쉬라고, 다음 만날 날을 기약하는 말 뿐. 담배하다 못해 건조함이 묻어 나오는 카톡 속에서 나는 오히려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끼며 스마트폰을 내려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