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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Hubris

우산이 없어요

추억 곱씹는 밤

by Argo

얼마전부터 엄마가 자주 듣는 노래가 있다. 하도 많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흥얼거릴 정도로 들은 노래는 우순실의 <잃어버린 우산>. 가사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지금 비속으로 걸어가는 나는 우산이 없어요




몇 주 전부터 집 근처에서 시작된 상수도 공사. 내 방은 도로와 가까운 쪽에 있어서 중장비들이 왔다갔다하는 소리가 아주 잘 들렸다. 아스팔트를 깨고 땅을 판 다음 파이프를 묻은 뒤에 아스팔트를 임시로 까는 작업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고 힘든 작업이라는 걸 이번에서야 알게 되었다. 며칠 전부터는 임시로 덮은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나머지 도로도 아스팔트를 까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은 드디어 우리집 앞 도로에 아스팔트를 깔끔하게 깔았다.


요즘 시차 적응 중이라 새벽에 서너 시간 자고 아침 일찍 잠이 깨는 날이 많다. 오늘도 새벽 세시에 잤는데 여섯 시에 깼다. 낮잠을 안자면 일찍 잠들어서 쭉 잘 수 있을 것 같아서 오늘은 낮잠을 안 자려고 했지만, 조울증 특성상 잠이 부족하면 위험하기 때문에 - 잠이 부족하면 재발 위험이 급상승한다. 조금만 부족해도 감정 기복이 차츰 심해지고 짜증이 늘어나는 걸 실감할 수 있다 - 점심을 먹고 소화를 시킨 뒤 잠에 빠져들었다.


세상 모르고 잠에 빠졌다가 살짝 잠이 깨서 창문을 쳐다봤다. 무거운 눈꺼풀 사이로, 두꺼운 커튼 사이로 비친 빛은 제법 어두웠다. 얼마나 잔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다 시끄러운 소리가 창가에서 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자기 전 담배를 피러 나갔을 때만 해도 집 근처로 올 것 같지 않았던 아스팔트 공사가 드디어 집 앞을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은 조금 깼지만 몸은 무거움 그 자체라서 이제는 익숙해진 굉음과 그 사이를 비집고 들려오는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있었다. 한참을 듣고 있는데 뭔가 이질적인 소리가 자그마하게 들렸다. 무슨 소리인지 귀기울이다 문득 빗방울 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오후에 비온다고 했는데 정말 오는 건가?' 졸음 가득한 눈을 억지로 떠서 폰을 켰다. 밝은 빛에 눈가를 찡그리며 일기 예보를 확인하니 비오는 시각이 당겨져 있었다. 큰 공사 소리와 음악 소리를 뚫고 들리는 빗소리가 정겹게 느껴졌다.


한 시간 정도 누워서 작은 빗소리와 잠 기운에 취해 몽롱함을 즐기다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리저리 몸을 풀어봐도 남아있는 잠을 쫓아내려고 우산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비는 생각보다 많이 오지 않았다. 우산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담배를 피웠다. 니코틴과 빗방울 소리 그리고 산책 덕분인지 잠이 깨었고 배고픈 속을 달래려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향하며 문득 우산 없이 비를 맞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목이 아파서 - 글쟁이의 고질적인 직업병인 손목 통증. 자매품(?)으로 어깨와 목, 허리 통증도 있다 - 우산을 들기가 힘든 것도 있지만 어릴 때의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20년도 더 된 - 정확히는 25년 -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나는 약간의 설렘을 안고 집에 도착했다.


뜨끈한 곰국에 밥을 말아 청양 고추와 함께 배를 채우니 아까의 설렘이 조금 사라졌다. 날도 어두워진데다 언젠가부터 비오는 날, 눈오는 날이 싫어졌기 때문에 그 여파가 남아 있던 것이다. 옷과 신발이 젖는 느낌이 좋지 않았으니까.


그러다 귓가에 빌리 아일리시의 노래가 들렸다. 비 오는 날이면 빌리의 노래와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노래를 듣는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라서 틀어놓고 밥을 먹고 있었다. 고민하던 찰나에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는 잠들어 있던 - 혹은 꺼져가는 - 추억을 되살렸다.




비를 맞아야겠다는 기묘한 열정(?)에 사로잡혀 마시던 맥주를 밀봉해 냉장고에 넣은 다음 만반의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아까보다 더 내리고 있는 비를 보며 망설이던 것도 잠시, 나는 발을 내딛어 빗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모자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는 우산을 쓸 때보다 더 크게 들렸다. 마치 귓가를 두드리듯 들려오는 빗소리와 그 사이를 채우는 빌리 아일리시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 걸음 두 걸음 걷기 시작했다. 처음엔 너무 오랜만에 비를 맞는 거라 어색했지만 이내 우비를 쓰고 장화를 신은 채 빗속을 뛰어다니던 그 때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비를 맞으며 비에 젖지 않게 고이 모셔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예전부터 비 맞으며 담배를 피는 게 가능할까 궁금했었는데 오늘에서야 실험을 해본 것이다. 비가 꽤 많이 쏟아지는데도 바람이 거의 없어서인지 비에 젖어도 담배는 잘 탔다. 간직했던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본격적으로 비를 맞기 시작했다.




비를 맞아서 신난 어른이


제대로 비를 맞아보라는 구름의 뜻일까. 집을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 비가 더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여름의 장마처럼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걷는 내내 입가에서 미소가 멈추지 않았다. 누가 볼새라 입을 꾹다물었지만 입가가 꿈틀꿈틀거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꼬꼬마로 돌아간 느낌, 그동안 지켜왔던 규칙 - 비에 젖지 않게 해야 한다 - 에서 벗어난다는 것에서 오는 해방감, 비를 맞는 그 자체가 주는 쾌감... 이 모든 게 합쳐져 마음을 들뜨게 했다.




쏟아지는 비. 영상을 찍고 나서 비가 더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빗속을 거닐다 빗줄기가 점차 약해지는 걸 느꼈다. 신발이 촉촉하다 못해 축축해지기도 했고 다리도 무거워서 - 거의 한 시간을 걸었으니까 - 이제 집에 가려고 집 근처에 다다른 순간......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조금 더 걷고 가라는 듯, 굵어진 빗줄기의 유혹에 넘어간 나는 집을 지나쳤고 빗물에 손이 약간 불었을 때서야 집으로 귀환했다.



잔뜩 물을 머금은 외투. 겉보기와 달리 방수는 완벽했고 아이폰도 안전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을 화장실 한 켠에 걸어두고 따듯한 물로 샤워를 했다. 다리에 묻은 흙을 씻어내는 동안에도 웃음이 새어나왔다. 최근에 이렇게 즐거웠던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재밌는 시간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냉장고에서 마시다 만 맥주를 꺼내 한 모금 마셨다. 여전히 차갑지만 김이 조금 빠져 있었다. 맥주를 마시며 생각했다. 우비를 쓰고 장화를 신은 채 빗속을 뛰어다니던 꼬꼬마는 이제 커서 담배를 피고 맥주를 마신다. 우비가 외투로 바뀌고 그때 신은 장화도 없으며 사는 곳도 다르다. 하지만 그 시절 내가 느꼈던 재미, 빗방울이 온 몸을 두드리고 그 두드림이 만들어 내는 소리의 상쾌함, 물웅덩이를 첨벙일 때의 감촉은 여전하며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로 여전히 살아있다. 내가 좋아하는 이매진 드래곤스의 <It's time>의 가사처럼 말이다.(1)




약 2년 동안 해왔던 할아버지 회고록 작업을 끝내고 갭먼스를 보내는 요즘, 이런 저런 생각에 고민이 많았다. 작업을 마치고 난 다음에 밀려오는 후유증 - 에너지 고갈, 허탈감, 목표의 상실 등 - 과 함께 앞으로 뭘 할지 고뇌에 차 있었다. 조울증이 한창 진행중일 때는 당장의 고통, 증상을 견디는 것에만 몰두하다보니 미래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미래는 너무 멀었고 오지 않을 것 같았으며 생각하는 건 사치였으니까. 그러다 차츰 안정기에 접어들고 조울증과 함께하는 삶에 적응하게 되자 '그 이후의 삶'이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회고록 작업을 할 때는 여기에 집중하느라 유예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당면한 과제를 해결해야 하다보니 막막함과 두려움이 많았다. 조울증으로 생긴 제약들 - 이전에 세워둔 진로 계획의 변경, 컨디션 변화에 따른 업무 조정이 가능한 직업 등 - 로 인해 새로운 시도나 직업 탐색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2) 작가로 살겠다는 건 그대로지만 글로 단기간에 수입을 얻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하기에 흥미와 적성도 있으면서 조울증의 특성에 알맞는 직업을 찾는다는 게 쉽지 않다. 회고록하면서 편집디자인이 생각보다 재밌고 적성도 있는 듯해서 이 분야로 가닥을 잡고 있지만 배워야 할 것도 많고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의도적으로 아무것도 안하고 있지만 이런 생각들은 무시하려해도 지속적으로 나를 힘들게 했다. 그러던 중 추억을 떠올리며 순수한 웃음을 짓게 만든 '비맞이'는 마음을 새롭게 해줬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지만 비를 맞았다는 사실 하나로 인해 마음에 한결 여유가 생겼다. 어쩌면 내일 다시 걱정을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매우 만족스럽고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두려움과 걱정으로 가득찼던 일상이 먼 과거였던 것처럼만 느껴지고 미래가 낙관적으로 보여지는 건 아니지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시간이 오래 걸려도 그래서 남들보다 늦어지더라도, 어렵고 힘들더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마음을 모아 오늘은 일찍 잘 예정이다. 시차 적응부터 잘하는 게 지금의 최우선 목표니까.




(1) 이매진 드래곤스 it's time에는

It's time to begin, isn't it?

I get a little bit bigger but then I'll admit

I'm just the same as I was

Now don't you understand

I'm never changing who I am

라는 가사가 나온다. 어디에서 본 글에 의하면 보컬인 댄 레이놀즈가 작곡한 이 곡은 그가 음악을 하기 위해 대학교를 자퇴하며 느꼈던 심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이 하고 싶었지만 주변의 반대와 자신에 대한 확신의 부족으로 음악을 포기했었던 그는 마침내 대학교를 그만두고 음악을 하기로 결정을 내린다. 자퇴를 하고나서 길거리를 전전하며 어렵게 음악을 하던 그는 한 락 페스티벌에 땜빵으로 들어간 것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이매진 드래곤스에 이르게 된다. 이매진 드래곤스의 멤버 중에는 버클리 음대를 다니다 밴드 활동을 위해 한 학기를 남겨 놓고 자퇴한 사람도 있다는 게 이 밴드의 특이점 중 하나다.


(2) 조울증은 수면 부족이나 과도한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재발할 가능성이 높은 질환이다. 아무리 약물치료를 비롯한 여러 치료를 잘 받는다해도 이런 위험성은 늘 존재하며 그렇기에 적절한 컨디션 유지가 중요하다. 때문에 이런 조울증의 특성을 고려해 컨디션이나 증상에 따라 업무량, 업무 시간 등을 조정할 수 있는 직업과 직장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이런 점을 고려해줄 만한 직장은...... 없다. 그나마 있다면 공무원 정도?(장기간 병가가 가능하다) 아직까지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닥을 긴다는 점과 이해도 자체도 낮은 걸 볼 때 조울증 환자가 직장 생활을 한다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어떤 책에서는 이러한 점을 고려해주는 직장을 찾지 못할 경우 프리랜서나 자영업처럼 스스로 일정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는 직업을 택하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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