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뜸하던 코로나가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내가 사는 대전에는 꽤 오랜 시간 동안 확진자, 특히 지역 감염자가 거의 없었기에 수도권에서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아련하게만 들렸다.
하지만 너무 빨리 안도했던 탓일까. 자고 일어나면 늘어나 있는 확진자 수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오늘 아침에도 3명이 늘었다는, 특히 동네에서 확진자가 또 발생했다는 소식이 불안을 가중시킨다. 이번 지역 감염의 시작이 우리 동네였고 - 비록 감염력은 낮은지 생각보다 접촉으로 인한 확진자는 적은 편이지만 - 서너 명의 확진자가 있다는 사실이 더더욱 가슴을 옥죄인다.
내향적인 성격의 나는 코로나 사태가 발생하고 나서 집에 있는 것이 그리 불편하지 않다.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우울하거나 힘들지도 않고 어디 놀러가는 것도 딱히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외향적인 엄마는 외출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는 것에 큰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고 적잖은 우울감도 있다.
사람이 고픈 엄마는 코로나라는 장벽을 만나 하나의 해결책을 찾았다. 그것은 바로 '넷플릭스'. 넷플릭스에서 제공하는 예능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을 보면서 간접적으로나마 사람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나오는 걸 보고 나면 기분이 새로워진다는 엄마의 말을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렇게라도 방법을 찾았으니 다행이다 싶다.
원체 예능을 잘 안보기 때문에 미스터트롯이나 하트시그널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엄마가 이 두 프로그램을 재밌게 보다보니 나도 어쩔 수 없이 조금이라도 보게 되었다. 둘 다 나름 흥미로운 점이 있기도 하고 엄마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라도 - 프로그램을 잘 몰라도 된다. 옆에서 재밌냐고 물어보면 뭐가 재밌는지, 얘는 이렇고 쟤는 어떻고 엄마의 설명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나는 가만히 듣다가 맞장구 치고 말해준 걸 기억했다가 한 두마디 정도 더하면 이야기가 술술 나온다 -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두 프로그램 중에서 요즘의 대화거리는 하트시그널이다. 시즌3를 보고 있는데 나는 제대로 본 게 아니라 아직도 누가 누구인지 잘 모른다. 그저 엄마가 설명해주면 그때서야 대충 기억나서 이야기할 뿐. 그럼에도 내가 흥미롭게 엄마와 대화할 수 있는 건 우리가 '심리학'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심리학을 전공했고 엄마는 대학교에서 전공은 아니지만 심리학 관련 수업을 들었었다(엄마는 작업치료학과를 나왔는데 좋은 학교라서 그랬는지 필수과목으로 심리학과 임상심리학을 수강했다). 그리고 나중에 미술치료사 자격증을 취득해서 상담도 했었고. 그래서 우리의 대화 속에는 항상 심리학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이론적인 부분을 다루기도 하고 생활 속에서 느끼는 심리학적인 부분을 나누기도 할 정도다.
<하트시그널>과 심리학. 이 둘은 그리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관련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심리학이 100% 알아낼 수는 없지만 말이나 행동에서 보여지는 부분을 추적하다보면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출연자들의 외모와 행동, 주어지는 단서들 - 직업이나 취향 등등 - 을 해석하고 추리하며 대략적인 프로파일을 만드는 작업을 암묵적으로 하고 있다.
엄마와 내가 함께 열을 올렸던 건 출연자들의 성격 분석이었다. 출연자들의 첫인상, 대화, 행동, 스펙을 조합해 각자 분석한 결과를 공유하고 서로 다른 분석을 했다면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도 대화의 주제로 삼았다. 우리가 출연자들 중에 가장 흥미롭게 분석했던 사람은 남자 출연자로 출연자 중에 가장 고스펙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1화에서 이 사람을 봤을 때 '아 이 사람 좀 피곤한 스타일인데? 이런 남자 만나면 스펙은 좋은데 여자가 고생 할 듯?' 이런 느낌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자신 없어 보이고 눈치 보는 듯한 표정에서 그런 느낌이 들었고 무엇보다 내 '촉'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보자마자 엄마에게 내가 느낀 걸 그대로 말했고 엄마는 반신반의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다 나중에서야 한참 보고난 뒤에 엄마도 내 말에 동의하기 시작했다. 자존감이라는 키워드로 출연자들을 분석하면서 엄마는 고스펙 출연자의 자존감이 가장 낮은 것으로 보이고 스펙과 나이로 보면 여자들의 워너비이지만 실제로 만나면 피곤한 스타일, 여자가 꽤 희생할 부분이 많은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엄마는 왜 이런 평가를 내렸을까?
우선 이 출연자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했다. 다른 출연자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끝끝내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상대방과 엇갈릴수도 있었다. 성격도 FM에 가깝고 범생이 스타일이며- 이 두 가지는 스펙과 외모에서 유추한 것 같다 - 자신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고. 의기소침해 보이는 것도 있는데 이런저런 단서들을 조합해 볼 때 성장과정에서 스펙을 쌓기 위해 지나친 압력이나 비교에 시달리다보니 자존감이 낮아진 게 아닐까, 그래서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고 표현도 못하는 게 아닐까라고 분석했다. 쉽게 표현하지 못하고 의기소침하다는 건 주변에서 계속 관심을 가져주고 돌봐줘야 하는, 손이 많이 간다는 것이기에 피곤할 수 있다는 것이고.
우리는 실제 그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니라 그저 화면에 비치는 모습만 놓고 평가했기에 실제 모습은 다를 수 있다. 다만 우리가 분석하는 것에 흥미를 느낀 것은 평가하는 행위 그 자체였다. 맞고 틀리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저 같은 대상을 두고 비슷한 관점(심리학)에서 바라본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대화의 주제로 삼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었다. 상호작용의 도구이자 일종의 유희인 셈이다.
우리는 타인을 만나면서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을 평가한다. 그래서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상대방에게 호감을 주는 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이 첫인상은 여러 단서를 통해 설정되고 오래도록 기억된다. 한번 형성된 첫인상은 상대방에 대한 태도, 상대방의 의도를 해석하는 방식 등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우리는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인' 해석인 첫인상을 진실로 여긴다.
하지만 우리가 상대방을 평가하는 기준은 우리의 경험을 기반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분히 편향적이고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같은 행동이 문화권마다 다른 의미를 지니듯 우리가 지각한 단서들이, 그 단서를 기반으로 내린 평가가 객관적인 진실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상대방에 대한 첫인상을 그리면서도 추후에 수정할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작품의 대략적인 방향을 설정하는 스케치가 언제든 수정될 수 있는 것처럼.
그렇다고 첫인상을 불신할 필요까지는 없다. 합리적인 해석에 근거한 판단이라면 첫인상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직감은 생각보다 정확하다는 심리학 연구 결과도 있고 애초에 첫인상이 효과적이지 않았다면 인간의 진화과정에서 사라졌을테니까. 그러니 불신과 맹신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엄마는 남자 출연자들을 놓고 "데이트 상대로 괜찮은 사람은 한두 명 있는데 결혼 상대로는 아무도 없다"라는 말을 했다. 왜 이런 결론을 내렸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는데 이걸 분석하는 것도 나름 재밌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