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전쟁, 끝나지 않은 전쟁
"할아버지! 오늘 6.25라서 전화했어요.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거 감사드려요."
"그래 고맙다. 안 그래도 오늘 6.25라서 죽은 동료들 생각나고 그래. 마음이 착잡하다."
70년. 이제는 더 이상 환갑이 장수의 상징이 아니게 된 현재에도 70년은 제법 긴 시간으로 여겨진다. 사람의 나이로 치면 노년의 시기로 불릴 만큼의 시간이다. 그리고 이 시간은 한국전쟁의 나이다.
아침에 일어나 오늘도 어김없이 산책하러 밖으로 나갔다. 일기예보에는 흐림이라고 되어 있었으나 혹시나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산을 챙겼다. 아니나 다를까 비가 조용히 흩뿌리고 있었다. 나는 우산 속에 숨어 담배를 피고 외가에 전화를 걸었다.
언제 들어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할아버지를 바꿔달라고 말씀드렸다. 할머니의 "6.25날이라고 전화했나 봐요"라는 말이 어렴풋이 들렸다. 목소리가 떠나간 자리, 또 다른 목소리를 기다리는 동안 잠깐의 침묵이 우리의 물리적 거리 사이에 내려 앉았다. 문득 참을 수 없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졌다. 망할 코로나 같으니라고.
잠깐의 기다림 끝에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의 안부를 물으시는 할아버지께 답을 해드리고 소소한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매년 6월 25일마다 했던 멘트를 반복했다. 늘 고맙다고 하셨던 할아버지께서 오늘은 사뭇 다른 말을 하셨다. 통화가 끝나고 나서 나는 할아버지의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죽은 동료가 생각난다는 말이, 착잡하다는 그 말이.
얼마 전 할아버지의 회고록 작업을 마치고 그 결과물까지 세상에 나왔다. 원래 계획은 직접 회고록을 가지고 할아버지께 달려가는 것이었으나 코로나 때문에 무산되었다. 회고록은 내게 오지 못했고 할아버지께 바로 전달되었다.
대략 2년 가까이 되는 시간동안 회고록 작업을 하면서 나는 할아버지께서 얼마나 참혹한 시기를 지나셨는지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몸에 남은 전쟁의 흔적을 자주 봤었지만 그때는 어려서 그랬는지 할아버지가 많이 아팠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러다 이번에 활자로 마주한 할아버지의 기억을 통해 전쟁이 남긴 상흔이 얼마나 깊은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1931년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을 맞이하셨다. 회고록에는 일제 시대의 기억과 해방의 순간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 전쟁이 발발하던 그 날 또한 생생하게 적혀 있었다. 휴가 나온 장병들은 부대로 복귀하라는 라디오 방송,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 줄지어 내려가는 피난민들, 북한군이 점령한 도시에서 벌어진 무참한 학살들. 형님이 피신한 곳에 다녀오던 밤, 철길 위에서 마주친 시신들을 보며 마음을 졸여야 했던 소년이 거기에 있었다.
할아버지는 한국 전쟁이 발발한 순간을 기록하시면서 그 다음 장의 제목을 "자유는 누가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자만이 누릴 수 있다"고 하셨다. 나는 그 제목 밑에 임의로 "교복 대신 입은 군복"이라는 부제를 달고 부상을 당하시기 전까지의 시간을 묶어 "학도병으로 시작한 군 생활"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학도병. 영어로는 student soldier. 두산백과에는 "전쟁 또는 사변시에 학생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적과 싸운 의용병"이라는 말과 함께 "6 ·25전쟁 당시 북한공산군의 무력침공을 막고자 애국학생들이 분기하여 무기를 들고 전투에 참가한 학도의용군을 말한다."고 쓰여져 있다. 할아버지는 인천공업학교에 다니던 18살에 한국전쟁을 맞이했고 그해 12월 18일, 세찬 겨울 바람을 맞으며 1,300여명의 학도병들과 함께 부산으로 향했다. 지붕도 없는 화물열차를 타고 굶기를 반복하며 내려간 부산. 그곳에 있는 육군 제2훈련소에서 20일 간의 훈련을 끝내고 육군통신학교로 보내진 할아버지는 1951년 3월 1일, 육군571부대에 하사로 임관하게 된다. 그때 할아버지의 나이는 19살. 1년 전만 하더라도 교복을 입었던 까까머리 소년은 교복 대신 군복을, 펜 대신에 총을 잡았다. 그 소년은 1년 뒤에 자신이 군복을 입게 될 거라고 상상을 했을까?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군복을 입었던 할아버지는 약간의 훈련만 받고 참혹한 전쟁 속으로 내던져졌다. 그리고 전쟁은 십대의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했다. 본격적으로 전쟁에 마주하고나서 얼마되지 않아 지근거리에 떨어진 포탄으로 매몰되어 죽을 위기를 겪기도 하고 야간에 이뤄진 북한군의 습격으로 구덩이 속에서 불안에 떨며 뜬눈으로 밤을 새워야 했다. 함께 부산으로 향했지만 각기 다른 곳으로 흩어진 친구들과 이별의 슬픔을 겪어야 했고 바로 옆에서 친구들이 총탄과 포탄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목격해야 했다. 물자가 부족해 "거지군대" - 할아버지는 그때의 한국군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셨다 - 생활을 하며 겪어야했던 어려움도 빼놓을 수 없다.
어릴 때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에 자주 갔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곳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사망한 사람의 이름을 새겨놓은 벽들이 있다. 방문할 때마다 할아버지는 그곳에서 이름들을 찾았다. 나는 할아버지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때의 내가 알기에는 너무 어려웠던 감정, 고독이라는 것을 말이다.
휴전 협정이 맺어진 후, 할아버지는 양구로 배치되었다. 장교로 임관하거나 상사로 진급하여 직업군인 생활을 할 것인지, 아니면 사회로 나가 "경제활동"을 할 것인지 - 할아버지의 선택지에는 중단한 학업을 계속한다는 것은 없었다 - 고민하던 때, 할아버지가 탄 수송 트럭이 절벽에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리고 이 사고는 할아버지의 오른쪽 다리의 뼈를 산산조각 내었고 - 골절이 아니라 말 그대로 "조각"으로 깨뜨렸을 뿐만 아니라 혈관과 신경을 손상시킨 중상이었다 - 그로인해 20개월 동안 병상에서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는 회고록 작업을 하면서 부상을 당한 기록 부분을 지나칠 때마다 항상 눈물이 났다. 학업을 중단하고 학도병으로 참전한 것만 해도 비참한데 부상까지 당하다니! "차라리 별 것 없는 인생 죽어졌으면 내 운명은 깨끗이 끝났을 터인데"라는 할아버지의 말에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어언 70년이 지났다. 오늘 아침 산책을 하며 둘러본 풍경에는 그 어디에도 전쟁의 흔적은 없었다. 우뚝 솟은 아파트들과 스쳐지나가는 자동차들 사이에서 전쟁은 남의 나라, 그리고 아주 먼 역사 속의 이야기 같았다. 마치 우리들이 한국전쟁을 그저 역사의 한 페이지, 있었지만 의미는 가벼운 사건으로 여기는 것처럼. 하지만 할아버지에게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은 전쟁이자 살아 숨쉬는 현재진행형의 사건이다. 기억 속에 선명히 남은 죽은 전우들과 몸에 남은 상흔이 남아있는 한 결코 끝날 수 없는 사실이다.
고층 아파트에 산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할아버지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숨이 막히고 두려움이 밀려온다고 하신다. 전쟁이 남긴 상처는 몸 뿐만 아니라 영혼에 까지 남아 지금도 살아서 할아버지를 괴롭히고 있다.
우리가 지금 향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할아버지를 비롯한 학도병들, 숱한 참전용사의 희생, 그들의 눈물과 피로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이들의 희생 뿐만 아니라 북한의 만행을. 그들로 인해 죽어간 숱한 사람들을.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자유를 위하여서 싸우고 또 싸워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 하리"
(6.25전쟁 노래 가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