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은 깨지기도 하잖아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메시지, 이거 참 잔인하고도 좋다.
글에는 감정을 오롯이 전달할 수 없는 활자만의 딱딱함이 있다. 말의 뉘앙스에 감정이 실려 있어도 어쩐지 일방적으로 전달받는 느낌이라 좀 잔인하다. 그래도 나 또한 그 순간에 바로 답하지 않아도 돼서 좋다.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하고 내용을 확인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그냥 창을 닫았다.
난 메시지를 읽은 상황이 됐고 한참을 대답하지 못했다. 왜 대답을 바로 하지 않았을까? 찰나 놓쳐버린 타이밍에 기분은 한없이 가라앉았고, 폭풍전야의 고요가 깨지듯 바람이 일고 일순간 엉기기 시작했다. 교환 차 들렀던 구두가게 점원과도 겉돌더니 나는 졸지에 황당한 고객이 되어 버렸고, 부랴부랴 마무리를 하고 차를 빼서 또 출구를 놓친 채 지하차도를 달리고 있었다. 차라리 답을 할걸...
화는 나지 않았는데, 어디든 달아나고 싶어 못 견디겠는 듯했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
"나는 원래 어떤 사람이었지? "
"약속이 내가 아닌 상대방에 의해서 깨졌을 때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었나?"
"왜 무슨 일 있어?"
"어렵게 잡은 거였는데. 치... "
따지고 보면 맥은 같다.
“당신이 약속을 깨서 나 좀 서운해, 대체 무슨 일이길래 약속까지 취소야.”
그런 속내가 깃들인 거다. 그래, 이게 나지.
아니 보통 사람들은 다 그런 거 아닌가?
이상하게도 화는 나지 않았다. 일이 생겨 약속을 취소한 사람이 한없이 이해가 됐고, 깨진 약속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나도 이해가 됐다. 다만 끝도 없이 가라앉는 날 어쩌지 못해 당황스러웠다.
“약속은 깨지기도 하잖아. 그런 거지.”
나락으로 치닫는 날 구원한 건 어쭙잖은 상황 일반화였다.
늦은 밤이 돼서야 답을 했다. 미안해했다.
"그런 거지... 뭐, 음... 처음엔 할 말이 없어 그런 거지 했는데,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거지 뭐. 약속이야 깨지기도 하잖아."
눈물을 참았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내가 한 "그런 거지"라는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서야 바닥까지 가라앉았던 나는 수면 가까이 나올 수 있었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서럽게 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비단 깨진 약속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전날의 피로와 스트레스에다 혼자 보낼 시간이 좀 애처로웠던 걸까? 난 정말 괜찮다고 무겁지 않게 전하고 나서야 마음이 편해졌다.
전에 없이 사람을 통해 커가는 나를 느끼는 요즘이다. 상대방의 어떤 기제가 내게 작용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시간을 가지고 마음을 되짚게 된다.
만약 바로 대답을 했더라면 어떤식으로든 상대방을 나무랐을테고 더 미안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더불어 내마음도 부대껴 불편한 상황이 되었을 듯 하다. 시간차를 두길 잘했다.
한 발 물러나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건 살아가는데 여러모로 유용하다. 순간의 감정은 도화선이 될 소지가 다분하고, 한번 터지면 걷잡을 수 없어지니까.
이성적인 것과는 다른 절제...
물러난 시간동안 생채기가 좀 난다고 해도 말이다.
글 ㅣ ir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