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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Jan 15. 2016

너도 그냥 퇴근 해버려!

그럴 수 없는 사람,

"진짜 B형 맞아요?  피검사 다시 한번 해보세요."

가끔 소심하다며, 어떤 일인가에  전전긍긍해 한다며 날보고 동료들이 농담처럼 던지는 말이다.

혈액형이 사람의 기질을 대변하는 건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B형 타입은 전혀 아닌가 보다.


새로운 업무를 맡았다.  매일매일 원고를 받아 디자인을 해서 사람들이 볼 수 있게 웹에 업데이트를 하는 업무였다.  원고가 늦어지면 자연히 디자인이 늦어지고 후속 작업들이 줄줄이 밀리고 보니 정해진 퇴근시간은 없는 상황이 되었고, 주말 행사 스케줄이라도 잡힐 때면 휴일 근무도 마다하지 않아야 하는 그야말로 삶이 저당 잡힌  업무였다.  


업무를 주는 쪽은 정규 업무 시간 외의 OT(over time)에 대해서도 별로  미안해하지 않는 듯했고, 일이 있을 때는 주말 출근도 당연히 불사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워커홀릭  갑돌이였다.  본인의 일에 대한 열정과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나에게도 고스란히 이입시켜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디자인이라도 미리 잡아 놓으려는 생각으로 원고 초안을 받아서 선작업을 하고 디자인 시안에 대한 검토 요청을 하면, 이게 내가 받았던 초안을 수정한 원고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의 생소한 원고가 디자인 검토 안과 함께 나에게로 왔다.  시간은 이미 퇴근 시간을 넘기고 있는데 언제 이일을 끝내고 집에 갈 수 있을지... 답답한 상황이 반복되었다.  나 혼자 해야 하는 작업이라면 짜증이 나건 울며 겨자먹기로 물리적인 체력 소모만 하면 될 텐데, 나 또한 누군가에게 업무를 시켜야 하는 상황이고 보니 마음까지 고단했다.  늦은 시간까지 사람을 잡아놓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일을 함께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 미안해서 마음이 부대꼈다.  대충 마무리를 하고 혼자 감당할 수준이 될 때쯤 잡고 있던 사람을 보낸다.  그게 편하다.  그렇게 남은 일을 정리하고 휑한 상태가 되어 퇴근을 하면 자정을 넘기기 일수였고, 새벽 퇴근도 잦았다.  

밸런스가 깨지는 게 당연했다.  회사에서 잃어버린 시간 탓에 하지 못한  집안일들, 곳곳에서 펑크가 나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지 싶었다.  상사에게 내 식의 볼멘소리와 어필을 해보지만, 듣기만 할 뿐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않는다. 하긴 내 OT 기록만 봐도 알터인데, 아무 말 않는 걸 보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나.


예측할 수 없는 생활은 힘들었고 매일 같이 반복되는 소모적인 작업들에 지쳐 갔다.  자연히 우울한 날이  많아졌고, 동료들과의 티타임에  볼멘소리가  잦아졌다.  


"힘내... 걔는 왜 그런다니... 진짜 너무하네! "


처음엔 내 상황을 파이팅해주고 비정상적인 갑돌이의 업무 스타일을 비난하며 동조해줬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삼세번인가?  조금씩 나를  답답해한다.  


"네가 길을 잘못 들인 거야,  몇 시까지 원고 안 주면 너도 못해준다고 배짱부려,  검토 안 해주면 그냥 퇴근해버려"


처음엔 농담으로 들렸다.  그냥 내가 안쓰러워 그렇게 라도 말해주는 건가 싶었는데 진심인 듯했다.  

그렇게 해보라는 거였다.  


"나도 이제 세게 나갈까?  안 해주고 그냥 퇴근해 버리면 어떤 상황이 될까?  그쪽 팀에서 우리 팀장에게 뭐라고  하겠지?  그렇게 되면  그다음 상황은 어떻게  전개될까?"


여기까지 생각하니, 역시 난 할 수 없겠다.  그렇게 한 번쯤 호기 있게 펑크를 내고 배짱을 부려야 한다는데, 펑크를 낸 후 더  힘들어질 것 같았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고단했다.  소심해서도 아니고, 못나서도 아니고, 그런 말을 할 줄 몰라서도 아니다.  나는 그렇게 지르고 나서 더  힘들어지는 사람이다.  마음을 접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여전히 어떤 솔루션도 없지만 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너의 태도가 문제야' 라는 말은 듣지 말자.  나를 위한다고 하는 말들인데,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든건 너라고 나무라는 것 만 같다.  조금씩 나아지겠지 생각하고, 그만 투덜대기로 하자.  


대신 내가 용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선까지만  받아들이자.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에는 상대가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든 마음에 두지 말고 당당하게 아니라고 피력하자.  어떻게 엮인 관계든 내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 관계의 카드는 내가 쥐고 있는 거라고 믿자.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는 게 아니라 참을 수 없을 때는 참지 말자.  그래야 멀리 갈 수 있을 것 같다.  어차피 장기전일테니까.

지금의 이런 상황들은 내가 호락호락해서가 아니고, 틀려서도 아니다.  삶을,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좀 다를 뿐이다.  



 ㅣ iris

사진 ㅣ i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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