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에서 2년간 승무원으로 재직하다 사직 후 지난 9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현재 구직활동을 중단하고 2달째 놀고 있다. 몸과 마음의 완벽한 힐링이 이런 걸까. 행복하기 그지없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안색이 너무 좋아졌다며 연신 놀랬다. 사직의 가장 이상적인 모양새는 다음 직장을 잡고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며 그만두는 거겠지. 나는 그만 둘 무렵, 동료들에게 몸과 마음이 지쳤으며 더 이상 열정이 없고, 한국에 돌아가 가족,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다음 거처는 정해진 바 없다고.
사직서를 내고 남은 한 달의 시간 동안 내내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토록 바라던 일인데, 그만두면 후회하지 않을까? 나는 이제 뭘 해야 하는가. 공백이 길어져서 돈 떨어지면 어쩌지. 매일매일이 드라마 같던 이 특별한 일상을 그리워하진 않을까. 됐다. 드라마긴 한데 뭔 놈의 드라마가 고난만 계속되나. 아무도 안 볼드라마에 더 이상 출연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회사가 나를 사용하는 게 열받았다. 나는 어쩌면 내일 당장 죽을 수도 있다. 근데 내가 오늘 참고 버티는 게 맞나? 내가 두려워하는 최악의 상황은 뭔가. 쓸모없는 인간으로 평가받는 것? 내가 평가받기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나? 없다. 그렇다면, 돈 떨어지는 것? 남들만큼 풍요롭게 살지 못할까 봐? 아니 풍요는 고사하고 나의 존엄을 지켜줄 돈을 차곡차곡 모아야 하지 않나? 그런데 지금 당장 내가 불행하면 지금 나의 존엄은 어디 있는가? 나는 끈기 있는 사람이고 의미를 느끼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기에 내가 잠시 직장을 그만둔다고 해도, 향후 나를 빈곤하게 만들지는 않을 거라는, 나에 대한 그 정도 신뢰는 있었다.
그래서 지난 두 달간 내가 뭘 했냐고 하면. 하루의 한 끼는 부모님과 식사를 같이했으며. 여기저기 병원 다니느라 바빴고, 책을 20권쯤 읽었고, 매일매일 8시간씩은 잠을 잤고, 브런치 작가가 됐고, 먹고 싶었던 한국음식 리스트를 거의 다 섭렵했고, 영어공부를 딱 재밌을 만큼만 했고, 베트남에서 우연히 발레 백조의 호수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아서 12월에 호두까기인형 발레를 예매해 놓고 설레하고 있다.
내가 좋아했던 일이 뭐였나. 나는 승무원을 다시 하고 싶나. 꼭 회사에 다녀야 하나. 나는 앞으로 어떤 형태로 살고 싶나. 이런 고민들을 그저 쫙 풀어놓고 놀고 있다. 32년을 살면서 이렇게 나를 이해할 시간을 한 번도 갖지 않았다. 가장 생각이 모이는 지점은 현재 나의 최소 생활비를모아둔 돈에서 쓰는 게 아니라, 부수익으로 충당해 보자는 게 목표다.
존 스트레레키의 세상 끝의 카페_클레이하우스
싱가포르에서 오디오북으로 수없이 반복해서 들었던 책이 있다. 존 스트레레키의 세상 끝의 카페라는 책이다. 이 책은 7년 연속 유럽 베스트셀러 1위라는 정말 유명한 책인데, 사실 유명한 책은 또 참 많아서 한번 읽으면 대부분 스쳐 지나가곤 한다. 그런데 어쩐지 이 책은 마음에 남아 출근 준비를 할 때마다 듣고 또 들었다. 들을 때마다 마음이 편해졌고, 일상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나도 몰랐던 내가 근본적으로 가장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삶의 의미에 대해서 얘기하는 책이다. 정말 잘 살고 있냐고 묻는다. 뻔하게 읽으면 뻔한 책이고, 준비된 사람에게는 '존재의 목적'이라는 이 책이 던지는 화두를 덮어두든 그 길을 향해 가든 잊을 수는 없는 화두를 던져두고 가는 책이다. 바쁜 일상에 치여 이 화두를 잊을까 두려워 듣고 또 들었던 것 같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존재 목적을 찾아내고 그 목적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한동안은 그저 존재 목적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이어도 괜찮을 것 같다. 나에게 주는 최고의 사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