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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안 Jan 03. 2025

공항 카운터에서 입국금지 당한 썰

내 인생에서 꽤 스펙터클 한 시기가 있었다. 때는 21년도 12월 코로나가 이제 드디어 끝나려나 하는 기대감이 있던 시기였다. 나는 항공 승무원이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그간 코로나로 2~3년 동안 채용이 없었고 항공산업 전체를 비관하는 전망도 많았다. 그러던 중 가뭄의 단비처럼 한 유럽항공사에서 유럽 전역을 돌면서 그 도시의 지원자들 중에 승무원을 뽑는 워크인 인터뷰를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당시 다니던 학원 원장님의 추천과 오랜만에 들려온 채용소식에 덜컥 욕심이 앞섰고 면접 대락 2주 전 헝가리 부다페스트행 비행기티켓을 끊었다.




KTV 국민방송

출국에 앞서 코로나 음성 확인서, 영문예방접종증명서 및 필요한 서류를 단단히 준비해서 공항으로 갔다. 공항 체크인 카운터에서 방문목적을 물었는데 이유인즉슨 현재 헝가리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외국인에 대해 입국제한이 내렸다며 출국이 불가능함을 알려왔다. 우리는 면접을 보러 간다고 말했고 체크인 카운터에서는 분주하게 재확인했으며 우리도 우리대로 상황을 파악해 나갔다. 코로나 시국이 처음이다 보니 그때는 모두가 우왕좌왕했다. 결론은 출국불가. 거기서 일정을 취소하고 돌아왔어야 했는데... 그때 우리는 다른 방법을 찾아낸다. 면접이 헝가리에서만 열리는 것이 아니고 유럽전역에서 열리고 있었고 그중에 입국규제가 없는 나라도 있을 거란걸. 


그래서 그날 동행과 공항 지하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5시간을 머리를 싸매고 고심한 결과 입국 규제가 없고 면접이 열리는 폴란드 바르샤바로 목적지를 변경하고 다시 다음날 출발하는 항공권을 예매하고 숙소를 잡았다. 그렇게 시작부터 고난이 예정된 여행길을 떠났다. 




환승지 핀란드 헬싱키공항의 무민카페
한 밤에 환승했던 핀에어의 작은 프로펠러 비행기

일단 나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여행의 시작부터 이미 정신적인 타격을 받았다. 예정대로라면 출국했어야 하는 날에 공항에 있는 호텔을 부랴부랴 예약해서 자고 다음날 여행길에 떠났다. 가면서도 갔는데 입국이 안되면 어떡하지 불안하고 초조했다. 폴란드 바르샤바까지는 환승 편으로 작은 프로펠러 비행기로 환승해야 했다. 너무 작은 비행기라 비행기 앞뒤로 무게를 맞춰야 한다고 앞에 앉은 승객들 중 자원자를 받아 뒷자리로 이동하도록 했다. 그리고 귀를 찢을 듯한 소음과 기압차... 




이때 처음 먹은 당근라페의 맛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환승을 위해 핀란드 공항에 내렸을 때부터 유럽에서 머문 여행 기간 내내 공항에서도 호텔에서도 길거리에서도 동양인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누가 코로나 시국에 유럽을 오겠는가. 그들 입장에서도 우리가 불청객일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구경'을 했다. 향후 외국에서도 살게 되고, 해외여행을 많이도 갔지만 그때의 묘한 분위기를 다시 마주하는 일은 없었다. 폴란드 공항에 내린 시간은 깜깜한 밤이었고, 목적지를 급하게 바꾼 터라 편의점에서 부랴부랴 유심을 사고 어찌어찌 호텔셔틀을 타고 숙소에 도착했다. 호텔에는 의무병처럼 보이는 군인들이 포진해 있었고 '아 이건 우리가 잘못 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다다음날 아침 그 와중에 면접이 열렸다. 공들여 화장을 하고 호텔 조식도 든든하게 먹었다. 서바이벌 형식으로 합격자를 추리는 방식이었고 중간에 탈락했다. 




폴란드 호텔 근처 아무 데나 들어간 한 식당의 연어 스테이크 너무 맛있었다.

그 정도에서 그만했으면 됐는데 이 글을 쓰면서도 내가 진절머리 나지만 우리는 한발 더 갔다. 면접이 그 나라에 각 도시를 돌면서 진행되는 거라 다른 곳에서 한번 더 보자고. 그래서 또 부랴부랴 교통과 숙박을 마련해서 기차를 타고 폴란드 카토비체라는 도시로 갔다. 그런데 카토비체에서 우리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는데 최근 몇 개월간 다른 지역에서 면접본 사람 재응시가 불가하다는 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안될 거라는 생각을 못해봤을까 싶지만 1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여기까지 힘들게 왔으니 무슨 수라도 쓰고 싶어 판단이 잘 안 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두 번째 면접은 보지도 못한 채 이력서만 내고 끝이 났다. 그곳의 면접관들도 우리의 사정을 듣고 안타까워하며 위로해 주었는데 참 감사했다. 




출처_뉴스원

그렇게 면접은 끝이 났다. 그날 저녁부터 나는 심하게 아프기 시작했고 동행은 시내를 구경하러 나갔다. 여기서 일이 더 터진다. 오미크론이 터지면서 해외입국자는 10일간 자가격리를 해야 한다는 정부방침이 갑자기 내려졌다. 이미 회사에 긴 연차를 써서 왔는데 또 폐를 끼치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가 가족들과 격리할 숙소를 알아보고 있었는데 부모님이 언니네 집으로 잠시 가겠다고 하셨고 추후 나는 우리 집으로 돌아가 격리하게 된다. 나의 욕심으로 인해 가족, 회사에 불편을 끼쳤고 공공보건에 잠재적 위험까지 끼칠 수 있는 결과를 만들었다. 물론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찌 됐건 나의 선택으로 파생된 결과이니 책임이 없어질 수 없다. 폴란드에서 다시 코로나 검사를 받고 음성판정을 받아 무사히 귀국했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다시 코로나검사를 하고 음성판정을 받았다. 회사에 다시 한번 면목없는 연가를 내고 집에서 홀로 격리에 들어갔다.




격리하는 동안 10일간 두문분출하며 거실에 이불을 깔아 두고 그저 넷플릭스를 보며 배달음식을 시켜 먹었다. 금전적인 손실, 면접에서 떨어진 수치심, 모두에 대한 죄책감, 무리한 계획을 실행한 나의 어리석음에 대한 후회에 잠겨있었다. 그리고 내 꿈이 또 한 번 내 손을 빠져나갔다는 것... 그 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다른 항공사에 승무원으로 합격했고 젊음의 한 자락을 열심히 불태웠으며 지금은 퇴직 후 한국에 들어와 있다. 그때의 기억은 시간이 많이 지나서야 꺼내볼 수 있을 만큼 외면하고 싶은 것이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때의 무모함과 열정이 그립기도 하다. 얼마 전 유퀴즈에 나온 고현정 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퍼런 청춘'이었던 것 같다. 






연말 고대하던 설레는 여행길을 떠나셨을 텐데

불의의 사고로 인해 황망한 마음 감출길이 없습니다. 


희생자분들께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그 심정을 감히 헤아릴 수가 없지만 

유가족분들께 깊은 위로의 마음을 전합니다. 


나, 그 누구나의 일이 될 수 있었음을 잊지 않고

정확한 진상규명이 될 수 있도록 

끝까지 연대하고 지켜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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