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와 센티멘털의 맛, 주인공의 친구 기즈키를 중심으로
몇 년을 주기로 계속해서 읽는 책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이다. 이 책의 유명세에 비해서 나는 한참을 나중에 읽었다. 몇 가지 계기가 있었는데 그 당시 일하던 회사의 팀장님이 그리 독서를 즐기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 책을 재밌게 읽었다고 했다. 또 노르웨이 숲이라는 이름으로 2017년 출판 버전의 책 표지가 무척 맘에 들었다. 좋아하는 화가인 마크 로스코의 Green, Red On Orange를 연상케 하는 디자인이 추운 계절의 감수성을 불러일으켰다.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과 노르웨이 숲이라는 제목 뭐가 더 나을 것이 없이 둘 다 너무 좋다. 둘 다 그 소설을 듬뿍 표현하는 제목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 또한 이 책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이 되어 그의 책을 여러 권 읽었고 신작이 나오면 쪼르르 달려가 단숨에 읽는다. 그의 책을 읽다 보면 어딘가 비슷비슷한 플롯으로 흐른다. 등장인물들만 봐도 평범하고 어쩐지 여자들에게 인기 많은 남자주인공, 현실에 있는 존재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아름다운 소녀, 그와 상반되는 도발적인 매력의 유부녀 여자친구. 이런 설정의 인물들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런데도 알면서 먹는 그 맛 때문에 매번 찾아먹는 음식이 있듯, 하루키 소설의 그 맛이 맛있어서 읽는다. 하루키의 소설 중 단 한 권만 추천하라고 한다면 단연 [상실의 시대]이고, 재미와 센티멘털로만 소설을 평가한다면 하루키를 따라갈자가 많지 않은 것 같다.
※ 여기서부터 스포일러 있어요.
주인공 와타나베는 인생에서 많은 상실을 경험한다.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계속해서 잃는다. 주인공의 절친한 친구 기즈키는 소설 초반에 등장하는 인물로 와타나베와도 독자와도 그다지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한다. 책의 초반 독자는 갑자기 기즈키를 잃고 이미 허탈한 마음으로 남은 이야기를 읽어나가게 된다. 책을 센티멘털하게 끌고 가는 시작이다. 그리고 그가 왜 죽음을 선택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단서는커녕 끝까지 그에 대해 알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는 물음표로 남음으로써 그를 잊을 재간이 없다.
내게는 기즈키라는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사이좋은 정도를 넘어 나에게는 말 그대로 유일한 친구였다.)나오코는 그의 여자 친구였다. p 48
기즈키에게 분명 냉소적인 기질이 있어 남의 눈에는 오만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뿌리부터 친절하고 공정했다. 셋이 있을 때, 그는 나오코와 나에게 공평하게 말을 건네고 농담도 던져 누구도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배려했다. 어느 한쪽이 오래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쪽에 말을 걸어 자연스럽게 입을 열게 했다. 그럴 때마다 기즈키도 참 애를 많이 쓴다는 생각도 했지만, 사실은 그리 힘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자리의 분위기를 순간순간 정확히 파악하고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또한 거기에 더해 별것도 아닌 상대의 이야기 가운데에서 재미있는 부분을 찾아내는 참으로 보기 드문 재능이 있었다. 그래서 그와 이야기하다 보면, 나 자신이 아주 재미있는 인간이고 아주 재미있는 인생을 사는 듯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p 49~50
애당초 그는 결코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학교에서는 나 말고 누구 하고도 친구로 지내지 않았다. 예리한 두뇌와 대화하는 재능까지 갖추고서 왜 그런 능력을 더 넓은 세계를 향해 펼치지 않고 우리 셋만의 작은 세계에 집중하는 것으로 만족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p 50
500페이지가 넘는 장편소설에서 고작 대여섯 페이지 등장하는 기즈키가 왜 유독 마음에 무겁게 남아있을까. 기즈키가 대단한 인물이어서? 기즈키가 매력 있는 인물임은 틀림없지만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그들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 시절 한 번쯤 겪어본 또래친구에 대한 동경의 감정을 떠올리게 한다. 능력치로만 보자면 주인공이 후에 만나게 되는 명문가출신 수재 나가사와 선배에 견줄 바가 아니다. 학창 시절 동경했던 또래친구는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며 사회 속에서 각자의 자리를 찾아간다.
그런데 그렇게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기 전에, 동경하던 친구를 상실해 버린다면? 친구는 세상사에 찌들지 않을 것이고, 사랑에 실패해서 우는 일도 없고, 얼마간 돈에 쪼들리지도 않고, 아니면 속물이 되지도 않는 곳에 영원히 머물게 된다. 그럼 어떻게 그런 빛나는 존재를 잊을 수 있을까. 주변사람들은 나를 포함해 이제 다 시시한 사람들뿐인데. 기즈키는 그런 노스탤지어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알프레드 알바레즈(Alfred Alvarez)는 『자살의 연구』를 통해 자살자의 심리에는 “자살이 나를 파괴하는 행동이라기보다는 삶에서 절대 찾지 못했던 평온을 누리기 위한 시도이며, 자살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재정립하고 처음으로 내 의지에 형태를 부여”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기즈키는 왜 스스로 죽었을까? 향후 나오코의 말에 따르면 와타나베가 보고 있는 기즈키의 모습과 나오코가 알고 있는 기즈키의 모습은 괴리가 있다. 나오코와 기즈키는 어린 시절부터 둘만의 세계를 구축했고 그 안에서 완전하고 행복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둘은 결코 그 둘만의 세계가 영원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와타나베를 매개로 세상과의 소통을 시작한다. 여기서 기즈키는 와타나베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자 하고 이를 꽤 성공적으로 해낸다. 와타나베는 기즈키를 높게 평가하고 친구로서 좋아하게 된다. 나오코는 기즈키와의 둘만의 관계에서 나아가 나오코, 기즈키, 와타나베 이렇게 세명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관계를 꽤 좋아한다. 아마도 세상과 안전하고 편안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고 이 관계 속에서는 기즈키의 만들어진 좋은 모습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즈키는 갈 곳을 잃는다. 어린 시절의 나오코와의 완전하지만 폐쇄적인 관계로 돌아갈 수도 없고, 새로운 관계에서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일 수 없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필연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이미 어린 시절부터 자신들만의 세계 속에서 성장의 기회를 잃어버린 기즈키는 죽음으로써 이 괴리와 중압감을 회피하는 것을 선택한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어느 날 한 직원이 갑자기 결근한다고 하자. 물리적으로는 그 직원이 없는 것인데, 역으로 팀원들은 결근한 직원의 존재감을 느끼게 된다. 그 직원도 매일매일 출근하던 회사에 스스로를 결근시킨 것이 된다. 어쩌면 기즈키는 자신의 의지로 자신을 없앰으로써 역으로 자신의 존재를 세우고 나아가 안식을 얻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학술논문 『노르웨이의 숲(ノルウェイ の森)』론 - 기즈키를 통해 보는 죽은 자의 상실감을 중심으로 -(2015) 이혜인 외 1명, 충남대학교, 일본문화학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