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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해석

책 초중반 진짜 재밌어요. 후반부 갈수록 조금 난해해져요.

by 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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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몇 년 동안 읽은 책 중에 제일 재밌었다. 이 정도로 취향에 맞는 책을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니 꽤 두꺼운 책인데 페이지가 넘어가는 걸 아까워하며 읽었다. 책으로 이만큼의 오락성을 끌어낼 수 있는 작가가 얼마나 있을까.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무라카미 하루키식 세계'의 집약체 같은 느낌이었다. 한국판 책표지가 무척 감각적이다. 탁한 녹갈색의 배경색, 우주 속 정체불명의 행성 같은 컬러풀한 기하학적 일러스트, 표지 정중앙을 크게 가로지르는 영문으로 쓴 작가명의 숲 속의 나무 같은 뾰족뾰족한 폰트도 매력적이다.


문득 무라카미 하루키가 몇 살인지 궁금해서 검색해 보니 49년생 노년에 접어든 나이였다. 어쩐지 나는 그를 계속 30대 후반의 남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내가 그의 작품을 언제부터 접했나를 간단하게 생각해 봐도 그럴 수가 없는데 하루키의 글은 항상 청년이 쓴 글 같아서 그랬나 보다. 글이 나이 들지 않는 감각을 유지하는 건 얼마나 각고의 자기 쇄신이 필요할까.


제목이 모호해서 한 번에 기억되지 않는데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일본에서 23년 4월에 출판된 신간이며, 한국에서는 23년 9월에 출판되었다. [기사단장 죽이기] 이후 6년 만에 발간된 장편소설인데 [기사단장 죽이기] 보다 더 재미있었다. [노르웨이의 숲] 만큼 대중적인 소설은 아니고 무라카미 하루키 특유의 관념적인 소설이다. 하지만 [1Q84]가 꽤 관념적인 소설임에도 큰 인기를 끌었듯 이 책도 [1Q84] 만큼이나 재밌으니 강력 추천한다. 먼 훗날 시간의 평가를 받은 이 책이 어떤 자리에 위치하게 될지 궁금하다.


이 책은 겉으로 드러난 내용으로만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는 소설이다. 후반으로 갈수록 조금씩 모호해지는데 비교적 신작이라 작품에 대한 해설이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책을 읽으며 궁금했던 부분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을 나누고자 한다. (다른 의견도 환영합니다.)









※ 여기서부터 스포일러 있어요.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는 실재하는 가? 도시의 정체가 무엇인가?

벽으로 둘러싸인 가상의 도시는 비물질, 비현실의 세계로 실재한다. 비현실의 세계면 비현실이지 뭐가 실재한다는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루키의 책에서는 비현실의 세계가 실재한다는 가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비현실의 세계는 고통이 없고 목적이 있는 허무하지 않은 세계로 그려진다. 그리고 이 소설 속에 몇몇 인물들은 현실세계와 비현실의 세계를 넘나들수 있고 나아가 두 세계 중 자신이 머물고자 하는 세계를 선택할 수 있다.




주인공의 첫사랑 소녀는 어디로 간 것인가?

주인공의 첫사랑 소녀는 '나'와 깊은 마음을 나누다 어느 날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진다. '나'는 이로 인해 평생 상실의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소녀는 진정한 자신은 가상의 도시 속에 있고 지금 주인공이 마주하고 있는 소녀는 그림자,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소녀는 현실에 있는 자신을 그림자, 도시(비현실)에 있는 자신을 진짜 자신이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 둘 다 자기 자신으로 실재한다. 다만 현실에 있는 자신이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실재 소녀이며, 도시(비현실)의 자신은 고통이 사라진 소녀가 추구하는 소녀이다. 소녀는 비현실의 삶을 믿거나 선택하여 현실에서 모습을 감춘 것으로 보인다.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도시(비현실)로 넘어간 것은 무슨 의미 인가?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주인공의 또 다른 일면인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과 소년은 많은 부분에서 동일시된다. 주인공은 처음부터 소년에게 인간적인 호감과 관심을 보이며, 소년이 저세계로 넘어가고 싶어 하자 이를 도와도 될지 진지하게 고민한다. 이는 주인공 자신의 고민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년은 이윽고 자신의 의지로 저세계로 넘어가고 그 도시에서 주인공과 결합해 꿈을 읽는 작업을 해나간다.


책은 결론적으로 '고통을 짊어지고 현실에서 살아라.'라는 말을 하는데, 동시에 주인공이 선택하지 않은 다른 가능성을 옐로 서브마린 소년을 통해 보여준다. 소년을 통해 하루키는 '현실의 세계가 정답이고 비현실의 세계는 틀리다.'라는 딱 떨어지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비현실에서의 삶의 무한성, 목적 있음을 추구하는 것 역시 오답이 아니라고. 현실과 비현실을 추구하는 가치들은 양립하고 있으며, 다양한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한다. 하지만 주인공 '나'는 현실의 고통을 짊어지고 사는 것을 택함으로써 하루키는 현실에 조금 더 무게를 준다.




고야스는 무엇을 상징하나. 고야스는 왜 죽은 후에도 현실세계에 머물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나.

이 책은 크게 현실, 도시(비현실) 두 가지 세계로 나뉜다. 그리고 현실 안에 고야스가 만든 도서관이라는 작은 비현실이 또 존재한다. 도서관은 현실에 닿아있는 공간이지만 현실과 비현실에 경계에서 다양한 미스터리가 벌어지는 장소이다. 고야스는 죽은 후에도 현실에 얼마간 스스로의 형상을 띄고 망령처럼 머물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는데, 고야스는 대체 뭘까?


고야스는 아들과 아내를 연달아 잃는 절망을 겪고 고통 속에 침잠하며 은거하는 생활을 한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남색 베레모와 치마라는 특이한 옷차림을 하고 성격조차 명량하게 변모한다. 이후 사비를 털어 도서관을 설립하고 관장으로 부임한다. 도서관은 고야스에게 삶의 활력을 가져다주고 고통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요새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로써 얼마간의 고통의 승화를 이룬 것으로 보이며 이를 통해 죽은 뒤에도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며 주인공과 도서관의 실정을 돕게 된다. 고야스는 옐로 서브마린 소년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이 갈 수 있었던 또 다른 삶의 길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고야스가 치마를 입는 이유?

고야스가 특이한 옷차림을 고수하는 이유는 처음에는 남다른 성적취향을 나타내는 줄 알았지만 그런 의미는 전혀 아니다. 그의 특이한 옷차림은 고야스가 고통의 승화로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다는 표식인 동시에 고야스를 현실에서 동떨어진 인물로 설정하는 장치가 된다.




고야스의 아내가 죽기 전 남긴 대파 두 뿌리의 의미는?

고야스의 아내는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고 깊은 절망에 빠진다. 그리고 자신이 누웠던 자리에 대파 두 뿌리를 남겨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하루키의 세계에서 자살은 삶을 비관하여 종결하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소설 속 인물들이 의식적으로 선택하여 현실에서 저 세계로 넘어가듯, 죽음으로써 현실을 떠나는 것 역시 선택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아내는 대파 두 뿌리로 자신의 의도를 알리고 가볍게 하고 있다. 죽도록 괴로워서 삶을 비관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있는 죽음 이후의 세계로 건너간다 라는. 대파 든 당근이든 중요하지 않은 것 같고, 생각의 전환을 위해 그저 뭐지? 싶은 오브제로 대파를 사용한 것 같다. 한 뿌리는 자기 자신, 한 뿌리는 아들로서.




커피숍 여주인의 성적불능의 이유. 주인공은 커피숍 여주인을 사랑했나?

주인공은 첫사랑 소녀를 상실한 뒤 중년이 될 때까지 다시 그렇다 할 연인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 인생의 초반 절대적이고 완전한 사랑을 경험한 뒤 이어지는 갑작스러운 상실이 트라우마가 되어 다시 그에 비견할만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상대를 만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시골마을의 도서관 관장으로 부임하게 되고 그 마을의 커피숍 여주인과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된다. 그녀 또한 주인공과 같은 타지인이고 작은 커피숍을 홀로 운영하는 30대 중반의 이혼경험이 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성적불능이라는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에서도 여자주인공 나오코가 성적불능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다시 다뤄진 커피숍 여주인의 성적불능은 어떤 의미일까? 그녀에 대해서 많은 서사가 나오지 않아 예측하기 힘들지만 그녀 역시 현실의 어떤 고통으로 인해서 마음을 닫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또는 주인공의 첫사랑 소녀의 대리인으로서 소녀의 고통을 넘겨받아 현실을 살고 있거나. 주인공이 첫사랑 소녀의 상실로 인해 마음의 고통을 갖고 있듯이 이 책에서는 마음의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 인물들이 나오고 그러한 인물들이 서로 자연스럽게 끌리게 된다.


그리고 주인공은 첫사랑 소녀에 대한 숭배에 가까운 감정에서 벗어나 커피숍 여주인을 사랑했나?라고 묻는다면 그녀를 사랑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에서 예스. 관계가 점차 발전됨에 따라 주인공은 커피숍 여주인과 사랑을 시작하는 단계에 들어선 것처럼 보이고, 이는 주인공의 성숙과 상실의 극복을 조금이나마 보여준다. 커피숍 주인은 주인공의 마음속에 망령처럼 머물러 있는 소녀가 아닌 현실에서 주인공과 사랑의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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