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르>를 보고
서로를 사랑하며 지적이고 우아하게 늙어가던 80세 피아니스트 부부. 어느 날 갑자기 아내 안느가 마비증세를 일으키며 반신불수가 된다. 끝까지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지키고 싶은 안느와 아내를 지키고 싶은 남편 조르주.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병원으로 보내지 않겠다고 안느와 약속을 한 조르주는 간호에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쇠약해져 가기만 하는 육체와 정신. 죽음의 문턱으로 속수무책 끌려가던 이들은 서서히 지치고 결국 안느는 "내가 왜 우리를 괴롭혀야 해?"라고 반문한다.
1959년 작 <히로시마 내 사랑>에서 사랑의 아픔을 연기한 서른 초반의 엠마뉴엘 리바는 아름다웠다. 그녀의 또 다른 영화 2012년 작 <아무르>를 플레이리스트에 담아두고 있었기에 주저 않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하루는 길어도 일 년은 금세라더니 한 여배우의 오십여 년이 이렇게도 빨리 흘렀단 말인가. 같은 사람이 맞는지 눈을 크게 뜨고 화면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세월의 징검다리를 몇 개 건너뛰면 함께 수십 그릇 밥을 먹었던 친구의 이름조차 잊는다. 그러나 동일인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 무색하게 ‘하나도 안변했어.’ 라는 말이 절로 나오듯 유심히 다시 보니 50여 년의 세월을 단번에 건너뛰어 왔어도 젊은 시절의 얼굴이 그대로 남아있다. 두 영화 모두 앞머리를 넘긴 단발머리 모습이라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내가 늙어버린 그녀를 빨리 알아채지 못한 것은 그녀가 촘촘히 놓았을 징검다리를 훌쩍 건너뛰었기 때문일 테다.
살아간다는 것은 태어난 곳에서 죽는 곳까지 촘촘하게 징검다리를 놓아가는 일이다. 절대 뒤돌아 갈 수 없는 다리, 가기 싫어도 일정한 속도로 한 발짝 한 발짝 발을 옮길 수밖에 없는 그런 다리 위에 서 있는 것. 삶이 저 편으로 건너가는 과정이라 한다면 늙음은 태어난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늙음은 현재진행형 동사다. 모든 것이 내 계획과 의지대로 착착 풀려나갈 때는 능동사 같지만 대체로 피동사 형태로 이어진다. 질병, 사고, 이별, 배신, 전쟁, 재난 등 삶에 가해지는 폭력은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대체로 우연적이다. 내 인생길에 놓을 돌을 내가 골라 선택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느닷없이 들이닥친 도둑처럼 무언가를 하나씩 앗아가거나 사라지게 하는 것들 앞에서 당황하게 된다. 시간은 언제나 선택을 재촉한다. 돌을 골라 들지만 놓고 불어온 바람이 옮겨다 놓은 돌멩이가 방향을 묘하게 비틀어 버리는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내가 가려고 했던 길이 이 방향이 맞았을까, 이쪽으로 가도 괜찮을까'하고 후회기도 하고 망설이게 되기도 한다. 그나마 나의 의지대로 움직여주던 육체마저 내 통제력을 벗어나게 될 때, 옆에서 같이 돌을 놓으며 방향을 의논하던 이들이 한 명 두 명 사라지기 시작할 때야 비로소 외로움의 진짜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노후를 대비해 충분한 돈을 모으고 질병에 대비해 운동을 하는 등 아무리 철통방어를 해도 도둑은 느닷없이 들이닥친다. 늙음이 두려운 이유는 삶이 합리적인 계획이나 대비만으로 극복할 수 없는 불가해하고 예측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왜 우리를 괴롭혀야 해?"
절규하던 안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짐이 된다는 것은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하다'는 것은 자존감과 수치심의 문제만은 아니다. 스스로의 양심과 상대방을 향한 사랑이 동시에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원래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했듯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도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안느가 자신의 인간다움이 '약해지는 것', '의지하는 것'에도 있다는 것을 잘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불혹(不惑)을 지나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는 나이에 섰다. 지천명이란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겨우 알게 되는 나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이순(耳順)으로 나아갈 수 없다. 지금의 내가 늙음에 대비해 미리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잘 받아들일 용기'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