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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Apr 01. 2023

스물한 살의 승희에게

<명상록>을 읽고


스물한 살, 봄날의 승희야, 안녕.

잘 지내고 있니?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하루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어,라는 질문을 받았어. 광안리 밤바다에서 남편과 첫 키스를 했던 날, 홀로 도쿄에서 출발하는 하코다테행 밤기차를 기다리던 순간, 전쟁과 평화의 마지막 장을 덮던 때 등등 행복했던 순간들이 퐁퐁퐁 뛰어오르더라. 하지만 그런 순간들은 그대로 두어도 얼마든지 시들지 않을 꽃. 한 번씩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단 생각이 들었어.


후회되는 미래를 바꿀 수 있다면 하루를 더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은 반대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어.

언니에게 그 사람을 절대 만나서는 안된다고 알려주러 가야겠다. 그 생각이 먼저 들더라. 하지만 그럼 내가 지금 사랑하는 H들을 만날 수 없잖아. 망설여지더라. 남편을 찾아가야겠다. 에릭클랩튼 공연 본 다음 날 쓰러져 한쪽 귀 청각을 잃게 될 거란 걸 알려줘야지. 하지만 그럼 회사를 계속 다닐 테고 연고 없는 부산까지 와서 나를 만날 일도 없을 거야. 몸이 아픈 지인들에게 건강을 조심하라고 해야겠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을 조심하여야 한단 말인가. 음식? 생활태도? 스트레스? 환경오염? 원인분명의 질병을 본 적이 없는데 괜히 그걸 안 순간 없던 병도 생기지 않을까.


생각은 그렇게 더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서 버렸어. 절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일은 없었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그냥 그렇게 일어날 일이었을 뿐. 누구의 공도,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어. 그렇다면 나는 스물한 살의 날씨 좋은 봄날로 나를 보내주고 싶더라. 피어나는 봄꽃을 따라 꿈도 사랑도 몽우리처럼 꿈틀대던 인생의 절정기. 상처도 늙음도 죽음도 아직은 얼쩡거리지 않았던 그때로 말이야. 하지만 나는 돌아가지 않을래. 과거를 얻기 위해 오늘 하루가 사라지는 것을 선택하고 싶지 않아.


대신 이렇게 편지를 쓰는 거야. 그곳엔 또 다른 내가 있잖아. 부탁하나 할게. 오늘 하루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아 순례를 떠나줘. 그들을 만나면 내가 함께 보낸 이 책을 한 권씩 나누어 주길 바라. 화사한 봄날 같은 날씨에 책의 쓴소리들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옷을 여며야 하는 위기의 순간에 펼쳐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고른 책이야. 이 책에 '육신이 아직도 생생한데, 영혼이 비틀거린다는 것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다.'는 구절이 있어. 이건 특별히 너에게 던지는 잔소리.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미래를 미리 걱정하지 말고 '현재의 시간을 너 자신에게 주어지는 선물로 만들어'가길. 사랑한다는 말도 눈으로 꼭 전해주렴.


추신: 참, 너 아직도 글쓰기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어.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즐겨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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