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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Jul 12. 2024

자기만의 방

다시 써 보는 2013년 7월 27일의 일기

 

일 년에 단 한 번뿐인 여름 휴가철에 결혼이라니, 민폐였나. "결혼식 전날이면 준비할 게 많을 텐데 불러내서 미안해요." 대현씨 부부를 만나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데 '여름휴가를 이번엔 부산으로 정했어요.' 하며 웃던 모습이 떠올라 내가 더 미안해졌다. 대체 인력 없는 직종에 종사하고 있다 보니 짧은 여름휴가에 맞춰 식을 올리고 가까운 곳으로 신혼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게 지인들에게 결례가 되는 일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둘이서 남포동 시내를 구경하다 숙소로 들어갈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에 등을 떠밀리듯 집으로 돌아왔다.       


 친정에서의 마지막 날이니 엄마와 같이 자라고 나를 내려주고 오빠는 혼자 신혼집으로 갔다. 내일이 정작 결혼식이지만 준비할 것이 크게 없다. 개인적인 손님들을 위한 돈 봉투도 챙겨두었고 다음 날 떠날 신혼여행 가방도 출국준비 완료. 여느 신부처럼 예뻐지기 위해 하루 전날 피부 관리를 하거나 네일 샵에 가는 것은 오히려 번거롭고 어색했다. 누워서 가이드 북 뒤편의 중국어 회화 문장을 따라 읽어보다가 책을 덮었다. 선풍기 한 대가 감당하기 힘든 한 여름 더운 공기가 방 곳곳에 침투했다.     


 이 방에서 스물 세 번의 봄을 보냈다. 안방에서 드레스 룸과 화장실 하나를 지나와야 하는 끝방. 아이들 방으로 마련된 세 개의 방 중에 제일 작았지만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베란다라는 방해꾼 없이 세상과 다이렉트로 소통할 수 있는 큰 창이 있었다. 창 바로 옆에 책상을 놓았다. 산 밑에 지어진 아파트라 8층이라 해도 의자에 앉으면 건너편 산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3년 동안 다닌 중학교 운동장이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방문만 열면 여름에도 큰 방 쪽으로 통하는 문이 쾅하고 닫힐 만큼 골바람이 서늘했다. 책상 의자에 앉으면 하나로 묶어 올린 포니테일 머리 꼬랑지도 휘휘 날렸다. 그러나 반대편 끝에 있던 보일러가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겨울이 오면 엄마는 언니와 한 방을 쓰라고 잔소리를 하곤 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누군가와 살이 맞붙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부잣집 망나니처럼 퀸 침대 중앙에 대자로 양팔을 뻗어야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창밖을 내려다보며 ‘새의 선물’을 읽고 j-pop을 따라 부르고 지구본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했다. 일기 대신 편지를 쓰던 나이,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고 더 멀리 더 넓은 곳으로 가고 싶던 때, 나는 내 시야를 가로막는 방범창이 불만이었다. “엄마, 우리도 이제 다 컸는데 이 창살들 걷어 내면 안 되는 거야?” 하고 재차 물었던 적이 있다. “살다보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위험해서 안 돼.” 돌아오는 대답은 매번 같았다.


결혼이 얼어붙은 여자를 녹일지, 더 꽁꽁 얼어붙게 만들지 모를 일이다. 나를 지켜주기 위해 내 시야를 가로막는 저 방범창처럼. '문을 잠그고 마음껏 자신의 사유로 빠져들 수 있는 한 칸의 자유', 자기만의 방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을지 모른다. 이제 진짜 스스로의 힘으로 ‘집’을 지어나가기 시작할 때가 왔다. 이익과 손해를 따지지도 묻지도 않는 우리들의 작은 공동체. 그 집 속에 창이 있는 '자기만의 방'을 한 칸을 꾸며나가는 것. 그것이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다. 그래, 오늘 같은 날은 ‘먼저 이해하고 사랑해라.’는 엄마 잔소리 같은 다짐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일 손을 잡아도 옆에 누워도 참 좋은 사람과 결혼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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