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승희 Sep 17. 2023

시끄럽고 번잡한 여행지, 부평깡통시장

나의 사적인 부산 여행기 1

80년대 부산 제 1상권은 남포동이었다. 90년대 후반이 되며 서면이 새로운 중심가로 부상했지만 8,90년대 학창시절의 보냈던 이들에게 '시내 나가자'는 말은 남포동 가자는 말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시내라 불리는 그 곳은 남포동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자갈치 시장이 있었고 왼쪽으로는 부평깡통시장, 국제시장, 극장가가 모여 있던 지금의 피프 광장을 지나 용두산 공원이 있는 광복동까지 이어졌다. 당시 우리는 국제 시장 위쪽으로 헌 책을 팔던 보수동 골목까지를 통틀어 남포동 일대를 시내라 불렀다.


어머니는 아이들 셋을 데리고 주말이면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다니셨다. 결혼하기 전 부평동에 사셨던 어머니는 종종 부평깡통시장으로 장을 보러 나오셨다. 어머니를 따라 콧바람을  쐬는 건 어디든 좋았지만 시내로 장을 보러 나가는 건 여행이라도 가는 듯 좀 더 설레었다. 국제시장과 4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이름이 바뀌는 깡통 시장은 부산의 실크로드였다.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부산 미군 부대에서 나온 군수품, 통조림, 초콜릿, 껌 등이 불티나게 팔리며 지금의 상권이 형성된 터라 깡통시장으로 불렸다. 그 후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는 보따리상들이 암암리에 물건을 팔기 시작했고 동서양 물품이 서로 마주보고 대치하듯 진열되었다. 지금도 담배, 양주, 수입과자, 동전파스를 비롯하여 참기름과 소화제 카베진까지, 미국과 일본 상품의 대표주자들이 빼곡하게 좁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이국적인 그 모습은 매번 낯설었다. 두리번거리며 인파에 휩쓸려 안쪽으로 조금씩 들어가면 외국에서 들여온 구제품, 옷, 신발을 파는 가게들을 사이에 두고 좁은 길 중앙에 식혜나 커피, 옥수수 등을 파는 난장이 있었다. 그릇 등 주방 용품을 파는 가게까지 두루 한 바퀴 돌고 나면 출출해졌다. "여기 오뎅은 좀 다르데이." 먹성 좋았던 우리 남매들 앞에는 어묵과 물떡 꼬치가 수북이 쌓였다. 깡통시장 끝에 이르면 옷깃이 스칠 정도로 많았던 인파는 확 줄었다.  다시 한국의 평범한, 생선, 어묵, 전, 야채 등을 파는 시장으로 풍경이 바뀌었다. 섬세한 사회학자라면 두 곳을 부평깡통시장으로 명명하는 실수는 하지 않았을 터였다.


깡통시장과 부평시장은 엄연히 분위기와 정체성이 다른 곳이었다. 이때부터 어머니의 장바구니는 본격적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어묵과 떡이 아랫자리를 차지했고 그 위로 두부, 갈치, 파, 고추 등이 차곡차곡 쌓였다. 가느다랗고 하얀 일미채가 담기면 속으로 ‘야호’를 외쳤다. 마지막으로 들르는 곳은 찐빵집이었다. 커다란 찜통 속 연기가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행인을 홀리는 곳이었다. 무거워진 장바구니에 아이 셋을 데리고 버스를 타기 힘들어 가끔 택시를 타야 했다. 그러나 합승이 있던 시절엔 버스보다 더 타기 힘든 게 택시였다. 셋 중 누군가는 뒤쪽에 숨어 있다가 택시 문을 열면 달려와 타기도 했다. 따끈따끈한 찐빵을 안고 돌아가는 길 역시 설렘으로 차올랐다.


10여 년 전 부평시장이 야시장으로 바뀌었다. 아케이드가 설치되었고 난장은 정돈되어 가게가 되었다. 환골탈피한 시장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부러 밤이 되기를 기다려 시장을 찾았다. 대만의 스린 야시장을 기대했던 내게 그곳은 영 어설퍼 보였다. 얼마 전 깡통시장에서 고물이 다 된 사진기를 고치고 나오다 가늘게 썬 무를 넣고 끓인 부평시장 떡볶이가 먹고 싶어졌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부평시장 쪽으로 갈수록 인파가 줄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유부주머니 전골, 어묵, 비빔당면, 죽, 칼국수, 튀김과 떡볶이 집 등 오래된 맛집들에 사람이 가득 했다. 삼겹살 김밥, 과일 젤리, 오징어 버터구이, 소고기 초밥, 탕후루, 새우꼬치 등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보러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더 예쁘고 알차게 자신의 모습을 단장한 시장에 나는 황홀해졌다.


추억이 깃든 시장의 모습이 변해가서 아쉬울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시끌벅적하고 번잡해야 더 좋은 곳이 바로 시장이다. 여전히 시스루 찐빵도, 이가네 떡볶이도 옛날 맛 그대로이기에 태평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부평시장은 가족 여행지다. 어머니가 아이 셋을 데리고 시장을 찾았듯 나도 혜령이 손을 잡고 현아와 함께 시장에 간다. 지하철로 세 정거장이면 관광객이 된 자의 자유로움과 여유를 만끽할 수 있다. 그곳에 서서 어묵 국물을 나누어 먹고 장바구니를 채우면 가끔 꿈틀대는 고독은 깊은 잠에 들고 만다. "닷새째 알제에 비가 그치지 않고 내리더니 마침내는 바다까지도 적셔버리고 말았다- 티파사에 돌아오다, 알베르 카뮈" 오랜만에 티파사를 방문한 카뮈가 열정에 겨워 노래한 이 에세이의 첫문장처럼 부산도 이틀 내도록 장대비가 쏟아졌다. 어릴 적 사랑한 도시를 여전히 정렬적으로 사랑한 그처럼 나도 변해가는 이곳을 변함없이 사랑한다. 저녁엔 비가 그친다니 느지막이 야시장으로 여행을 떠나보고 싶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