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승희 Oct 03. 2023

<울프일기>에 대한 독서 일기

잡동사니 같은 것들이 훗날 큰 자산이 될 거라 믿으며 울프는 일기를 썼다.

"내 일기가 어떤 모양이기를 바라는가? 짜임새는 좀 느슨하지만 지저분하지는 않고, 머릿속에 떠올라오는 어떤 장엄한 것이나, 사소한 것이나, 아름다운 것이라도 다 감쌀 만큼 탄력성이 있는 어떤 것. 고색창연한 깊숙한 책상이나 넉넉한 가방 같은 것이어서, 그 안에 허섭스레기 같은 것들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도 던져 넣을 수 있는 그런 것이기를 바란다. 한두 해 지난 뒤 돌아보았을 때, 그 안에 들어 있던 것들이 저절로 정돈이 되고, 세련되고, 융하비 되어 주형으로 녹아있는 것을 보고 싶다.
- 울프일기 p30"

버지니아 울프라는 인간의 보편성(명성, 돈, 평가, 인간관계에 자유롭기만 할 수는 없는 )과 현시대의 대작가가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집필에 대한 집념과 고독, 열정이 가득 담긴 글은 상상력과 용기를 나의 500ml 물병에 가득 부어주었다. 홀짝홀짝 받아 마시고 피와 살로 만들어야지. 그녀 자신에게 일기가 큰 자산이 되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울프일기를 읽는 동안 '울프일기에 대한 독서일기'를 쓰고 싶어졌다. 며칠 동안 짧게 쓴 독서 일기를 타이핑하고 보니 한 편의 글로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두 팔을 위로 치켜들고 뿌듯함의 기지개를 켤 수 있었다. 



23.9.19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하고 있다. 즐거워하면서도 힘겨워하며. 나도 그 소설이 읽고 싶어졌다. 계속 읽어보아야지 하던 소설을 이제야 읽을 거란 예감이 든다.


23.9.20

울프는 J다. INFJ 같다.  긴 글을 읽어야 할 때 하루 중 큰 덩어리의 시간을 빼앗기게 된다고 망설이는 부분 공감했다.


23.9.25

며칠 만에 <울프일기>를 읽었다. 일식을 묘사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어둠 속에 있다 밝아졌을 때 느껴지는 그 묘한, 고요하면서도 안정된, 제임스 터렐의 작품 속에 들어갔다 나온 느낌이었다. 여전히 이제 소설을 쓰지 않겠다 하고, 인물을 묘사하고, <올랜드>를 탈고하고, 푸루스트를 읽으며,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진 느낌'이라고 한탄했다. 글이 잘 풀릴 때 생기가, 그렇지 못할 때 침울, 스트레스받는 건 대작가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자연을 보고 감탄하는 울프의 모습에 내가 안도한다. 신경쇠약으로 죽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계획한 60페이지를 다 채우지 못하고 p178~p222까지 읽었다. 내 집중력의 한계다. 더 재밌게 읽기 위해 오늘은 여기까지. 아, 마지막으로 주변 인물 묘사하기를 연습하는 모습 Good! 진짜 마지막으로 "사람은 마흔여섯쯤 되면 구두쇠가 돼야 한다. 시간이 날 때는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만 싸야 한다."는 말이 마침 마흔여섯인 나에게 하는 말처럼 와닿았고 나는 어떤가 잠시 되돌아보게 됐다. 언제나 시간에 구두쇠처럼 굴지만 본질적인 일에 내 시간을 쓰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아, 이제 빵 성형을 하러 가야겠다. 과발효된 빵을 별로다. 필사는 다음에...


23.9.26

말랑이 스텝퍼 위에서 걸으며 <울프 일기>를 읽는 것이 일과로 자리 잡았다. 잘 안 읽힐 줄 알았는데 의외로 몸의 리듬에 맞게 글이 잘 읽힌다. 산책할 때처럼 정신이 깨어나는 느낌이다. <울프일기>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오전에는 30분밖에 읽지 못했다. 1928년 일기 부분이다. 울프는 소설에 대해 더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유명해지고 있다. 이렇게 표현했다. "대중들 눈에 나는 2인치 반쯤 커졌다."라고. 16년 만에 처음으로 주머니 사정이 넉넉해졌으므로 돈을 쓸 수 있지만 소비용 근육의 움직임이 자연스럽지가 않다고 하는 모습, 재치 있었다. 2인치도 아니고 '2인치 반'의 반, 그 디테일함, 이런 건 따라 써보고 싶다. 

 15페이지밖에 못 읽었지만 작품에 대한 고뇌, 어떻게 쓸까, 표현 방법 등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부분이라 흥미로웠다. 남은 35페이지는 밤에 꼭 읽고 자야겠다. 짜파게티를 끓이러 가자~


23.9.27

오전 내도록 짐 싸고 책 한 자 못 읽었다. 창평 가는 차 안에서 랜턴을 창문 옷걸이에 걸어 고정시키고 책을 읽었다. 그러나 <나는 solo> 본방 시청을 위해 책을 덮어버렸다.


23.9.28

p297까지 읽었다. 울프가 <파도>를 쓰고 고쳐 쓰고 탈고해서 책이 나오는 시기였다. L(울프의 남편)은 매번 '이게 최고 걸작'이라는 말을 책이 나올 때마다 하고 있다. 진심일 것이다. 3년 (1929~1931.7)이 걸린 소설이었다. 유난히 울프가 이 시기에 더 자주 아픈 것 같고 늙어가나 싶었다. 더 많이 읽고 싶었는데 조금 지루해진다. 창평 우리 방에서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이다 두어 시간 오빠와 수다를 떨어가며 읽었다. 잠이 오려고 하여 <토지>로 갈아탔다.


23. 10.2

오랜만에 (그래봐야 엿새) 책상에 앉았다. 오늘은 울프일기만 150페이지를 읽을 계획을 세웠다. 집중해서 읽어야지 했지만 50세, 51세 약 50페이지 분량을 읽고 나니 조금 지루해져 버렸다. 1시간 40분 정도 읽었나 보다. 차 한 잔 타고 화장실 다녀오고, 물 마신다고 들락날락 한 시간까지 하면 두 시간 정도 걸렸다. 배경음악으로 슈만의 숲의 정경과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1을 들었다. 울프의 신경 쇠약 증상은 심해지고 일기분량이 늘었났다. 에세이 쓰기 연습반 안나작가님이 '울프가 글쓰기 슬럼프에 빠졌을 때 극복방법을 찾아보라 했던'  가이드라인 2번째, 질문을 염두에 두고 읽으니 확실히 그런 부분은 눈에 더 잘 들어온다. 잠깐 쉬었으니 52세까지 쭉 집중해서 읽어야겠다.

지금 울프는 <파지터가 사람들>에 열중하고 있다. 명성과 비판에 더 초월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10여 쪽을 남겨놓고 (오늘 목표 분량 p457) 마라탕 먹으러 갈 시간이 되어 씻으러 가야 한다. 다 읽고 산뜻한 마음으로 산책 다녀오면 좋을 텐데. 울프는 <세월>로 제목을 바꾸고 지쳤다가 의욕에 넘쳤다가 절망했다가 한탄했다가 하면서 이 소설을 계속 써나간다. 너무 힘들어 보인다. " 그러나 내가 마치 가정부의 걸레처럼 거의 못 쓰게 됐다는 사실을 숨길 수가 없다. 내 머리말이다. <세월>의 마지막 쪽들을 마지막 수정 등을 하느라고 p434" 이런 부분에선 표현이 재밌어서  나 혼자 키득거리곤 했다. 

1936년 54세의 일기는 울프가 아팠던 탓에 짧게 끝났다. 드디어 <세월>이 완성되고 L이 읽고 감동했다. 고생한 끝의 완성이었다. 나도 <세월>을 읽고 싶다는 생각에 조급해졌다. 저녁을 먹으러 가기 전에 독서를 마쳤다. 오늘의 독서 끝. 아니 밤에는 다른 책도 조금 읽고 필사도 해야겠다.


23.10.3

역자의 해설 부분, 울프가 L에게 남긴 유서의 마지막 문장을 두 번 읽으며 책장을 덮었다. "I don't think two people could have been happier than we have been V" 이것이 그녀가 쓴 마지막 문장이었을 것이다. 울컥한다. 울프는 자살을 했지만 불행하진 않았다. 단지 질병(정신적)이 두려웠을 뿐이다. 일기 곳곳에 삶에 대한 행복과 기쁨, 글 쓰는 일에 대한 고난과 보람이 가득했으니까. 

이틀의 휴일이 있어서 울프 일기를 다 읽을 수 있었다. "오늘밤엔 바이런의 시를 끝낸다는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바이런의 시를 절마다 즐겁게 읽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읽기를 마친다는 것이 왜 즐거운지 알 수 없다. 책이란 좋은 책이든 나쁜 책이든 늘 그렇다 p15" 울프 일기를 마치는 내 심정이 딱 그랬다. 일기가 끝난다는 건 울프가 죽는다는 것이기에 두꺼운 책의 마지막을 덮는 쾌감에 묘한 미안함이 담기기도 했다. 

벌써 오후 3시다. 오전도 오후도 다 가버렸다. 현아에게 호두파이를 구워주려고 호두를 씻어 구워두었는데 계란이 없다는 걸 알고 포기했다.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호두 파이를 만드느라 시간을 썼다면 아마 <울프일기>는 금요일까지 읽었어야 했을 테다. 구운 호두와 커피 한 잔만 마시며 책을 읽었으니 식사 준비를 해야겠다. 울프의 일기도 이렇게 끝났다.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지금 얼마간의 기쁨 마음으로 일곱 시라는 것을 인식한다. 저녁 준비를 해야 한다. 대구와 소시지 고기, 그것들에 관해 글을 씀으로써 대구와 소시지를 얼마간 장악하게 된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p611"


ps. 이 책이 울프 일기장 중 책, 글에 대한 부분만 엮었다는 사실을 역자해설을 읽고 알았다. 일상일기도 궁금하다. 등대로, 세월, 보통의 독자들, 존재의 순간들, 막간까지, 다 읽어보고 싶다. 


THE END

매거진의 이전글 글감의 빈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