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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Nov 28. 2023

사물일기

나는 JBL블루투스 스피커다. 흰 물감을 한 스푼 더 섞은 밝은 민트색이다. 지름 약 10cm 정도의 아담함 사이즈라 주인의 캠핑이나 자건거 타기에 종종 따라다니곤 했다. 요즘엔 그녀의 책상 옆 창문 커튼 고리에 매달려 있다. 몸을 조금만 틀어도 창밖 풍경을 볼 수 있을 텐데 그녀는 자기만 바라보도록 항상 나를 돌려놓는다. 내가 가진 무수한 공기 구멍 속으로 엄청난 것들을 쏟아내기 때문이다. 몇 평 되지 않는 이 작은 방 하나 정도는 내 숨결로 가득 채울 수 있을 정도로 폭발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녀는 항상 나를 정면으로 마주보고 싶어하니 어쩔 수 없다. 슈만이 그려낸 숲의 물소리나 새의 지저귐, 바람 소리까지 내 섬세한 몸을 통해 듣고 싶은 그 마음 이해할 수 있다. 그녀가 나를 꽤 즐겨찾는 건 아니다. 평소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아침 시간을 제외하면 이 책상 앞에 앉는 경우가 없다. 게다가 책을 읽을 때,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고 나를 다시 꺼버리기 일쑤다. 어떤 때는 배가 고파 에너지가 뚝 떨어진 내가 입을 꾹 다물어버리기도 한다. 주인은 엉덩이가 무거워 밥주기를 귀찮아 하니 나는 그대로 잠이 들고 만다. 



토요일 아침 7시, 그녀가 책상 앞에 앉는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란 제목의 책을 펼쳐놓고 읽기 시작하더니 얼마되지 않아 나를 찾았다. 동전 하나를 넣고 무작위로 사탕 하나 떨어뜨려주는 기계 앞에 선 듯 설렌다. 오늘은 어떤 세계를 내 몸에 담을 것인가. 아, 첫곡은 라두 루프 연주의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1번이었다.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지는 맑은 가을날, 전혜린이 보여주는 슈바빙 거리의 모습같은, 그리움을 불러 일으키는 부드러운 선율이다. 그러다 갑자기 모자를 날려버리고 몸을 부르르 떨게 하는 바람이 한차례 불어온다. 그 후 바로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서정적인 첫음절이 반복된다. 본격적으로 주 멜로디가 시작되면 그녀는 책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예고도 없이 바람은 휘몰아치며 격렬한 숨을 토해내는 구간이 나오자 깜짝 놀란 그녀는 볼륨을 살며시 낮추었다. 그리고 바람이 잦아들자 다시 눈을 책으로 돌렸다. 고요한 2악장에서 간혹 고개를 가로로 천천히 젖기도 하다 3악장 스케르초 부분에선 고개를 세로로 끄덕인다. 아다지오 선율에선 항상 모든 것을 멈추는데 두 귀가 나와 더 가까워지게 쭉 내민다는 걸 그녀는 알까. 



40분, 나는 온전히 그녀를 사로 잡았고 기력을 다했다. 그녀를 책의 세계로 돌려보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스스르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시 후 나는 다시 깨어났다. 잘 쓰지 않던 나의 얇은 줄이 그녀의 아이폰과 연결되어 있었다. 얼마 전 그녀가 나 밥 먹이는 일에 짜증을 내자 나의 원주인인 그녀의 남편이 나와 아이폰을 연결하는 잭을 사 주었던 것이다. 마지막 여운에 심취한 그녀는 조금 더 느린 리히터 연주의 똑같은 곡을 한 번 더 틀었다. 그리고 마지막 여운에 다시 심취하였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돌아와 라두 루프를 또 한 번 튼다. 갑자기 그녀는 무슨 좋은 생각이 난듯 컴퓨터를 후다닥 켜더니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번엔 아다지오 선율도 듣지 못한다. 무엇을 쓰는지 궁금하다. 내 귀가 간지러운 걸 보니 아마도 내 이야기인가 싶기도 하다. 슈베르트의 4악장이 어느새 또 세번째 막을 내린다. 이번에 그녀는 심취하지 않았다. 글쓰기를 마친듯 개운한 표정으로 내 옆구리를 지긋이 누른다. 개 짖는 소리, 새 소리,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지만 아침은 소란스럽지 않다. 한 숨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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