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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Apr 02. 2024

나의 흰 대나무숲 은성이게

 2주 전 성당 앞에서 마주한 목련나무와 벚나무는 우편배달부가 느닺없이 툭 내민 봄소식이었어. '아니, 벌써?! 내 옷은 아직 패딩인데.' 그런 심정이었지. 반가워서 친구들 단톡방에 봄이 왔다고 떠들어대었네. 그런데 지금은  내리막길에 들어선 자전거처럼 봄에도 가속도가 붙었어. 감천 고개길 가로수가 온통 벚꽃으로 물들었어. 너도 그곳에서 2024년 봄날의 꽃을 만끽하고 있겠지?

 

4월 1일부터 못다 읽은 채 꽂혀 있던 <카뮈-그르니에 서한집>을 다시 꺼내어 읽고 있어.

하지만, 늘 그렇듯이 저는 또 지각생이 되었네요 (정확한 시간에 닿지는 못해도 약속은 엄수하죠). 그렇지만 사람은 본래 싫어하는 일에는 기꺼이 시간을 지키는 법이지요. (치과에 가는 거라면 결코 지각을 하지 않거든요). 그 밖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완전히 믿고 마음을 놓는 거죠. 하기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상대하는데 뭣하러 시간을 잘 지켜야 한 말입니까, 그들은 변함없이 거기 와 있는데 말입니다. 그렇긴 해도 역시 제겐 변명거리가 별로 없습니다. 제가 젊고 행복했을 때 제게 열올리는 체 하는 한 여자(그녀는 도지사와 결혼했지요)가 있었는데, 제게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사랑한다면 편지를 쓰는 거예요. 거기서 벗어나 면 안 돼요."
"아니죠, 참다 참다 못해 결국은 쓰고 마는 게 편지죠." 전 이와 같은 미묘한 차이 덕분에 딱지를 맞고 말았답니다.
 <카뮈-그르니에 서한집> p143


 '참다 참다 못해 결국은 쓰고 마는 게 편지죠' 이 대목에서 울컥 하더라구. 아주 오랜만에 '은성에게'로 시작하는 편지를 미치도록 쓰고 싶다는 생각. 한 시도 미루지 말자는 생각. 그것이 흰 여백이 가득한, 무척이나 좋아했던 이 공간으로 나를 데리고 왔어. 이 책을 처음 읽을 때도 딱 이런 심정이었던 것 같아. 카뮈-그르니에가 누가 한 명 운명을 달리할 때까지 30여년 동안 편지를 주고 받아 왔듯이 나도 너와 그러고 싶다, 그런 마음. '나한테 놀러와라'고 끊임없이 들이대기도 하고, 쓴 글에 긴 첨삭을 덧붙이기도 하고,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읽은 책과 요즘 몰두해 있는 생각을 두서 없이 늘어놓고. 쓰기 위한 글이 아니라 요술 연필이 저절로 써내려간 글들을 흐르면 흐를 수록 더 단단해지는 시간이란 상자 속에 하나 둘, 차곡 차곡 쌓아가고 싶었던, 그 때의 마음이 떠올랐어.


 로마제국쇠망사 3권에 고트족이 이탈리아를 정벌하러 가는 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어.

레기움과 메시나 해협은 길이 12마일에, 가장 좁은 통로의 폭이 약 1.5마일이다. 스킬라의 암초나 카리브디스의 소용돌이도 가장 겁 많고 실력 없는 선원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로마 제국 쇠망사 3> p208

함께 읽었던 <오딧세이아> 기억나? 오딧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 중에 메시나 해협을 지나는 부분이 있었잖아. 좁은 바다의 왼쪽은 바다에 사는 여자 괴물인 스퀼라가 있고 오른쪽은 카리브디스라는 소용돌이가 있어서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없는 '진퇴양난'의 위기에 맞닥뜨리게 되잖아. 배가 전복되어 모두 다 죽을 것이라는 신탁을 염두해두며 스퀼라 쪽으로 가기로 결심하면서 '혹시 전우들이 겁을 먹고 노젓기를 그만두고 배 안에 숨는 일이 없도록, 물리칠 수 없는 재앙인 스퀼라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라고 오딧세우스가 말하지. 나는 그냥 넘긴 위의 몇 문장을 유심히 본 사람이 잊고 있던 신화의 일부분을 언급하며 진퇴양난의 영어식 표현이 between Scylla and Charybdis 란 표현이 여기서 유래했다고 알려주었어. 순간 정말 너무 재밌어서 소름이 쫙 끼쳤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어느 순간부터 조금 무시하고 있었는데 아, 이럴 때는 너무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집에 와서 독서노트를 찾아 그 날의 메모에 기입된 내용을 읽어보았네.

'노력하면 막을 수 있는 일은 알려서 대비하게 하고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일은 모른 채 두는 것. 나는 이것이 오딧세우스의 지혜였다고 생각한다. 2022년 10월 18일' 이렇게 적혀있더라. 이 날 이 문장을 쓴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 날의 너의 공책엔 어떤 문장이 적혀있을까 너무 궁금해졌어. 다음에 만날 때는 우리의 독서 노트를 다 챙겨서 1박 2일 합숙을 하자고 제안하고 싶어졌다. 함께 한 독서 일기들을 꺼내 읽어 보길 바라. 그리움이 몽글몽글 가슴을 간질일 거야. 그리움이란 너무 뜨겁지도 아주 차갑지도 않은 미온수 같아. 이렇게 풀어낸 것으로 갈증이 가셨는지 글쓰기를 시작하던 그 때를, 둘이서 책을 읽어 나가던 그 시기들을 조금은 차분한 마음으로 돌아보게 된다. 그리워할 것들이 많아서 부자가 된 기분이 기도 하지만 이 그리움을 성냥 삼아 열정의 불을 붙여보고 싶은 욕심도 생기네.


너를 만나고 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네. 어쩐지 수다에 목이 마르다했어. 목마른 말이 샘물을 찾듯 너를 찾아가 볼 수도 있겠지만 오늘은 흰 대나무 숲에 내 마음을 풀어놓을게. 너의 봄도 새로운 인연들, 단 한 번 뿐일 올해의 벚꽃들과 함께 아름답길 기원하며 오늘은 이만 총총.

못다한 이야기는 또 만나서 하자.


-그리운 마음을 담아, 승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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